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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빛나는 고구려 천불(千佛) 중 29번째 불상을 찾아서

국보제119호, 연가칠년의 기록이 뚜렷한 고구려부처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구려는 한반도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국가였다. 그것도 중국의 전진의 왕이었던 부견이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갖고자 기원후 372년 순도스님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이때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이미 300년이 더 되는 때로 중국은 불교가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었다. 이후 고구려도 평양을 중심으로 많은 절들이 들어서고 불교가 융성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 불상은 연가 7년(53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참으로 귀한 고구려 불상이다. 불상 뿐 아니라 불상을 보호하며 부처님의 후광을 나타내는 광배가 온전하게 남아있고, 그 광배의 뒷면에는 불상이 만들어진 때와 목적도 자세히 글로 새겼다. 광배 뒷편 기록에 따르면, 이 불상은 평양 동사의 승려들이 불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1,000구의 불상을 만들었으며, 이 불상은 그 가운데 29번째 것이라고 적혀있다.

 

그 가운데 999구 불상은 어디론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이 불상만 남아서 전하고 있다. 1000구라는 숫자가 결코 작지 않지만, 1500년 세월 속에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 사찰에서 불상 1000구를 만들어 특별히 선정된 귀한 사람들에게 호신불로 내려주고 모시게 했던 것으로, 이 불상은 멀리 떨어진 신라의 사찰에도 보내 부처님 법이 널리 전해지기를 원하였다.

 

전체 높이가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불상이지만, 갖추어야 할 것은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이다. 불상은 광배까지 전체가 하나의 주물틀로 제작된 것으로, 둥근 평면 기단위에 연화좌대를 놓고 그 위에 바르게 서있는 모습이다. 불상의 뒤편에는 커다란 광배가 있는데, 불상과 광배까지 훼손된 곳이 없이 완전한 모습이다. 광배에는 활활 타오르는 회오리 불꽃문양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고, 광배는 불상의 뒤편에서 발뒷꿈치에서부터 시작하여 불상을 둥글게 감싸고 올라와 머리 위를 뒤덮고 있다.

 

불상의 하부 기단부터 광배 상단까지 전체높이는 16cm이고, 부처님의 전신높이는 불과 10cm도 안 된다. 부처님의 상호 또한 너무 작아서 자세히 묘사하기 쉽지 않지만, 이 불상은 머리는 불쑥 튀어나온 육계가 있고, 머리카락은 소라모양의 곱슬머리가 빡빡하게 박혀있는 나발이 뚜렷하며, 얼굴의 표정은 길쭉한 북방계 우리민족의 얼굴형상에 온화한 미소가 흘러넘치는 금동불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부처님의 몸에는 통견(양쪽 어깨를 감싸고, 가슴 앞부분에 둥근 주름이 진 옷모습)으로 걸친 옷자락이 몸에 잘 붙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손모양(수인)은 오른손은 시무외인(두려워하지 말라는 뜻)과 왼손은 여원인(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 뜻)이다. 이 귀한 고구려 금동불상을 앞 뒤 좌우로 돌아보며 한동안 고구려시대의 불교에 대하여 상상해 보았다.

 

이 불상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특별한 인연에 따라 신라로 보내진 부처님으로 당시는 신라에 처음 불교가 공인된 시기였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때는 528년으로 신라는 불교가 이제 시작단계였는데, 이때 고구려는 이미 150년이나 불교의 뿌리가 깊어진 때였다. 그렇게 깊이 자리잡은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런 귀한 부처님이 경남 의령의 어떤 사찰로 보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땅속에 묻혀있다 다시 출토되어 지금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전시실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1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이 부처님의 전체모습은 금빛으로 찬란하고, 구리의 녹슨 곳도 전혀 없다. 다만 광배의 뒷부분에 옆으로 실금이 간 모습이 있어 조금 아쉬울 뿐이다. 불상의 모습에 이처럼 구리의 녹슨 곳이 없는 것은 그만큼 금의 함량이 많기 때문이다.

 

이 불상은 국보 제11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상설전시 중이다.

불상의 뒤편에 새겨진 글자는 다음과 같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人共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因現義佛比丘法穎所供養 연가7년인 기미년(539)고려국(高麗國: 고구려)의 수도 낙양(樂良: 평양)에 있던 동사(東寺)의 주지스님 경(敬)과 그 제자 승연(僧演)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하였는데(이 불상은) 제29불인 인현의불(因現義佛)로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합니다. (문화재청 자료참조)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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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