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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금동관, 국보 제295호

백제에서 제작하여 마한의 지배자에게 하사한 것?
[큐레이터 추천 유물 79]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보 제295호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마한ㆍ백제 권역에서 출토된 금동관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관은 문헌 기록이 많지 않은 고대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금동관 가운데 띠 모양의 대관(帶冠)과 고깔 모양의 모관(帽冠)이 함께 세트를 이루어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관이기도 합니다.

 

나뭇가지 모양이 화려하게 장식된 대관과 연꽃의 봉오리를 정교하게 표현한 모관은 당시의 화려한 예술 세계와 정교한 금속공예 기술을 보여 줍니다. 대관은 둥근 테 앞쪽과 양 측면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세움 장식을 붙인 형태이며 달개와 유리구슬로 장식했습니다.

 

또 관테 중앙 부분에는 꽃잎이 6~7개인 연꽃무늬 11개를 표현하였습니다. 모관 가운데는 활짝 핀 연꽃무늬 아래에 3개의 꽃봉오리를 나란히 배열했고, 주변을 넝쿨무늬와 파도무늬로 꾸몄습니다. 관에 달린 유리구슬과 달개 등 화려한 치장과 정교하게 새긴 다양한 무늬의 장식으로, 당시 권력자의 위엄과 권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금동관의 첫 발견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17년 12월, 나주 반남고분군(사적 제513호)을 조사한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조사단은 나주 신촌리 9호분을 조사 대상으로 선택합니다. 그 까닭은 그곳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처럼 가장 좋은 장소에 권력자의 무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촌리 9호분에는 크고 작은 10개의 독널이 묻혀 있었습니다.

 

조사단은 발견 순서에 따라 갑(甲), 을(乙), 병(丙)…, 임(壬), 계(癸)로 순서를 매겼습니다. 이 가운데 을관이라고 이름 붙인 독널의 윗부분을 드러내자 독널 내부에서 주검의 흔적과 함께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무늬 큰칼, 세잎무늬 큰칼 등 화려한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발견으로 비로소 한반도에서도 독자적인 관을 사용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3년이 지난 1920년 양산 부부총에서 금동모관과 금동대관이 확인되었고, 1921년 경주에서 신라의 금관이 확인됩니다.

 

 

 

금동관의 제작지는 어디일까?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모관은 백제관의 형태와 비슷합니다. 비슷한 시기 백제는 대관을 사용하지 않고, 모관에 여러 장식을 꾸며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대관 형태를 관찰하면 신라ㆍ가야의 관 양식과 미슷한 느낌이 듭니다. 신라 대관은 주로 나뭇가지모양 장식을 사용해 꾸몄으며 금동보다는 금으로 만드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가야에서는 대관만 사용했는데 주로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꾸몄습니다.

 

나주 금동관의 대관은 신라의 나뭇가지모양이나 가야의 연꽃봉오리 장식과 비슷해 두 나라의 영향을 모두 받은 느낌을 줍니다. 모관은 백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대관은 가야ㆍ신라의 영향을 받은 점을 볼 때 서로 다른 나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금동관 수리의 의미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수리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금동모관의 경우 ‘∩’자형 테가 상부에서 하부로 내려올수록 넓게 퍼져 있으며, 좌측 판 바깥 테두리에 장식된 파도무늬는 테에 가려져 있는데, 이것은 모관을 줄이려고 판의 위쪽을 잘랐기 때문입니다.

 

금동대관도 수리의 흔적이 보입니다. 관테 양옆에 한 쌍의 못이 이유 없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흔적은 대관의 지름을 확장하면서 세움장식이 바깥쪽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왜 모관의 크기는 줄이고, 대관의 지름을 늘렸을까요? 단순한 제작자의 실수라기보다 실제 사용을 위해 치수를 조정한 흔적은 아닐까요?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일반적으로 백제에서 제작하여 마한의 지배자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여러 특징 때문에 가야계 금동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금동관의 제작지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진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