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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조선 시대의 돌림병 대처

[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4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조선왕조 시대(1392~1910)는 지구의 기후 역사로 보면 소빙하기(小氷河期)에 속한다. 소빙하기는 중세의 온난기가 끝나고 14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약 500년 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1~2도 정도 낮아진 시기를 말한다.

 

소빙하기 기후의 제일 큰 특징은 불안정성이다. 소빙하기가 시작되자마자 기후는 요동치듯 불안정해졌다. 불안정적인 기후 변동은 혹한의 겨울, 몹시 찌는 여름, 극심한 가뭄, 폭우, 그리고 온화한 겨울과 서늘한 여름들이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가뭄과 저온 현상으로 식량 생산이 줄어져서 영양실조와 기아가 빈번히 나타났다.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면역력이 저하되어 각종 돌림병이 창궐하였다.

 

 

조선 시대는 돌림병의 원인인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알지 못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원인 불명의 돌림병이 돌면 으레 역귀(疫鬼: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의 소행으로 받아들였다. 민간에서는 무당에게 굿을 청하여 역귀를 쫓아내고 병이 낫기를 바랐다.

 

병의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병을 증상으로 분류하였다. 피부에 돌기가 발생하여 커지면 두(痘, 천연두)라 하였고, 조그마한 돌기들이 발생하면 진(疹, 홍역) 그리고 모기가 문 것같이 작게 돋은 것을 마(痲)라고 지칭했다. 호열자(虎列刺)는 콜레라를 한역한 것인데 19세기 초 순조 때에 크게 유행하였다. 염병(染病)은 장티푸스를 말하는데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서 치사율이 25~50%나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392년부터 1917년까지 525년 동안에 전염병이 1,455건이나 기록되었다. 조선 시대에 돌림병이 돌았던 해는 무려 320년이나 되니, 조선 시대는 가히 ‘돌림병의 시대’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현종(103회), 숙종(87회), 영조(51회) 등의 재임 기간에 돌림병이 창궐하였다. 몇 가지 중요한 실록 기록을 순서대로 살펴보았다.

 

 

조선 초기인 세종 재임 32년 동안에 29건의 돌림병이 창궐했다. 세종 14년인 1432년 4월 돌림병에 관한 보고를 받은 세종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성중의 영선하는 공사가 한둘이 아니어서 경기의 백성들이 역사에 나가고 있으니, 이 무리들이 집을 떠난 채 돌림병에 걸린다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서울 안의 긴급하지 아니한 영선 공사를 중지하라.” 공사까지 중단시키며 집단으로 모이는 것을 금지시킨 지시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은 1434년 6월 11일에 동서활인원의 열병 앓는 사람에게 얼음 줄 것을 예조에서 청하자 부순 얼음(碎氷)을 보낼 정도로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었다. 세종은 1444년에 전염병이 번지자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역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라고 명을 내려 전염된 사람들을 격리할 것을 지시했다. 요즘 용어로 하면 자가격리를 지시한 것이다. 또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에게 의서를 편찬하라는 명을 내려 85권으로 구성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의서가 만들어졌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민간에서 이용되던 다수의 의학 서적들이 없어졌다.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는 한성으로 돌아온 후 1596년에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적을 편찬할 것을 지시했다. 《동의보감》 편찬 작업은 14년이나 걸려서 1610년 광해군 때에 완성되었다. 《동의보감》 저술을 마친 허준은 돌림병 방지와 퇴치 방안을 연구하여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과 《간이벽온방(簡易辟溫方)》을 만들었다. 광해군은 《간이벽온방》을 훈민정음으로 뒤쳐(번역) 전국 고을에 나누어주어 백성들이 돌림병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3년을 주기로 인구 조사를 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1669년의 인구는 5,772,300명이었는데, 3년 후인 1672년의 인구는 4,720,815명으로서 인구가 105만 명(18%)이 줄었다. 이들 사망자는 대부분 돌림병과 기아로 죽었을 것이다. 그 뒤 25년 후인 숙종 21년인 1695부터 시작된 2년 동안의 돌림병과 기근으로 142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영조실록에》에 따르면 영조 8년인 1732년 한양에 역병이 돌자 1,000여 곳에 격리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나면 신하들은 모든 책임을 임금에게 떠맡기고 임금의 부덕을 탓했다. 영조는 이것이 못마땅하였다. 영조는 모든 잘못을 임금에게만 돌리는 신하들의 버릇도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일을 맡은 신하들은 임금의 부덕이라고만 말하지 말고 구원하고 진휼하여 특별히 마음을 더 기울이고 경외를 막론하고 받을 것은 가을의 추수 때까지 미루어라. 모든 공헌(貢獻)은 백성의 고혈이다.” 재난을 당했을 때 납세를 미루어주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정조 10년(1786) 4월부터 6월까지 괴질(장티푸스)이 돌았는데, 죽어서 거리에 나온 해골의 숫자가 약 37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799년에는 전라도 일대에서 염병이 발생하여, 한 달 사이에 128,000명이 죽었다. 정조는 “굶주린 자와 죽어서도 장사조차 치를 수 없는 자들을 돕도록 하라”라는 명을 내리고 “각 지방에서 돌림병이 가장 번성한 곳을 골라 제사를 드리라”라고 지시했지만, 병의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역부족이었다.

 

정약용(1762~1836)이 지은 《목민심서》의 ‘애민’편 ‘관질’조에는 “돌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의 기운을 들이마셨기 때문에 생긴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의 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와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라고 기록하여 일종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염병이나 기근이 발생하면 조정에서는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무료로 나눠주는 진제장(賑濟場)을 전국에 설치하여 그곳에 오는 자는 출신지와 신분을 묻지 않고 음식물을 공급했다. 자기의 관할이 아니라고 무료급식소의 운영을 소홀히 하는 관리를 엄중히 처벌했고 수령들의 승진 평가에는 얼마만큼 기민(饑民)을 효과적으로 구제했는가를 반영하기도 했다. 또한 구휼(救恤: 감염 환자들에게 금품을 주어 구제함)과 진휼(賑恤: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도와줌)을 통하여 구호에 힘을 기울였다.

 

각 고을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자들은 자신의 재물을 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병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가정을 위해 대신 농사를 지어주는 등 상부상조하면서 돌림병의 피해를 극복하였다. 질병으로 죽은 백성들을 위하여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어 억울한 원혼이 없게 하는 것이 돌림병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미신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병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조선 시대의 돌림병에 관한 대처 방법은 병의 원인이 된 미생물은 몰랐어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돌림병을 개인 차원을 떠나서 마을 공동체의 문제로서 받아들였다. 코로나 발생 이후 우리 사회에서 나타난 착한 임대료 운동, 재난지원금,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 피해 지역의 의료봉사, 사회적 거리두기, 예방수칙 지키기 등등은 조선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는 재난 극복 방안들이다.

 

아무쪼록 백신과 치료제가 빨리 나와서 봄이 오기 전에 마스크를 벗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코로나 역귀야 물러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