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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임정의 일꾼’ 윤현진 선생 동상 제막식 열려

김원웅 광복회장, 모교 방문, 흉상 제막 이어 기념식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27일 오전, 독립유공자 윤현진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아 윤현진 선생의 모교인 부산 구포초등학교를 방문하여 동상 제막식과 교내에 기념식수를 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원웅 광복회장, 윤현진 선생의 손녀 윤 정 유족, 전재수 국회의원, 김석준 부산교육감, 정명희 부산 북구청장, 김선자 구포초등학교 교장, 김민선 학부모 회장, 구포초등학교 재학생들과 부산 경남 광복회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윤현진 선생(1892.9.20~ 1921.9.16,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은 경상남도 양산 출신으로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으며,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한 뒤 귀국하여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선생은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ㆍ이동녕ㆍ김구ㆍ노백린ㆍ여운형ㆍ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뽑혔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었다. 특히 백산상회자금 30만 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하도록 했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뽑혔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자금모금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을 펼쳤으며,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살로 요절하였다.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에서도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아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으로 치러져 상해의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5년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히 기리는 윤현진 선생을 기억하는 행사를 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선생의 행적이 모교에서부터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