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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는 집


언어는 하나의 기호일 뿐이어서 그 자체가 지닌 뜻이 별 게 없으므로 자주 써서 쓰임을 공유하면 그만이라고들 한다. 코끼리도 ‘코끼리’ 아닌 ‘끼리코’나 ‘상’(象)이라고 많은 이가 써서 통하면 된다는 얘기고, 마침내 ‘불고깃집’을 ‘가든’이라 불러도 통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랜 내림과 그 얼이 스민 좋은 연장을 갖춘 겨레한테는 이 말이 잘 먹히지 않는다.

외래어 ‘모델’은 광대·배우 뜻을 빼면 ‘본보기·본·틀·모형’으로 쓸 말이다. ‘모델케이스’도 ‘본보기’다. ‘모델하우스’라면 ‘본보기집, 본보기주택’이 쉽게 나온다. 이것보다 ‘견본주택’이라고 쓰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견본’ 역시 일제여서 즐겨 쓸 게 못 된다. 우리식 한자말로 ‘간색’(看色)이 있지만, 이를 아는 이나 쓰는 이가 거의 없다. 그러니 ‘본보기집’ 정도가 무방할 터이다.

요즘 서울 공덕동 달동네 자투리땅을 비집고 자그마한 ‘아파트’ 한 채가 들어섰다. 많아야 스무남은 칸짜리인 그 새 집 언덕축대에 흰 펼침막을 내걸었는데, ‘구경하는 집’이라고 써놓았다. 흔히 ‘모델하우스·견본주택’처럼 임시로 번지르르 얽어놓은 가짜집이 아니다. 다 지은 집 가운데 길에서 드나들기 편한 집을 골라 ‘구경하는 집’을 꾸린 뒤 들어와 살 사람, 또는 ‘분양 신청’을 받는다. 집 이름을 ‘장미집’ 아닌 ‘로즈빌’로 지어 아쉬운데, 흙냄새라곤 멀고 뜻도 모를 저 재벌 업체들의 ‘하이페리온·쉐르빌·래미안 …’ 들보다는 다소곳하다.

임자들이 다 들 때까지 저 ‘구경하는 집’은 지나는 이들의 가슴을 당길 듯하다. 굳이 토를 달지 않아도 ‘본보기집’ 이상으로 그 말이 순하고 마음 깃들 틈이 넓은 까닭이다.



한겨레신문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 중에서
최인호/ 교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