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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와 서양 / 권재일

일상생활에서 낱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삶의 애환이 깃든’의 ‘애환’은 ‘슬픔과 기쁨’이라는 뜻인데, 슬픔인줄만 알고 쓴다. 그래서 가끔 ‘삶의 애환과 기쁨이 깃든’과 같이 겹친 표현이 나온다. 뜻을 잘못 알고 쓰는 말 가운데 ‘서구’라는 말도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경제의 위기는 세계 경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광복후 서구의 학문, 특히 미국의 학문 방법론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여기서 ‘서구’(西歐)라는 말은 잘못 쓰였다. 이는 서구라파(西歐羅巴)를 줄인 말이다. 구라파는 ‘유럽’을 한자음을 빌려쓴 표기다. 프랑스를 한자음을 따서 ‘불란서’라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그렇다면 앞에서 ‘미국을 비롯한, 미국의 학문방법론’과 같이 미국을 포함하는 경우 ‘서부 유럽’을 뜻하는 서구라는 낱말을 쓰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대신 ‘서양’이라는 말을 써야 올바르다. 따라서 서유럽을 가리킬 때는 ‘서구’라는 낱말을, 미국과 유럽을 함께 묶어 표현할 때는 ‘서양’이라는 낱말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한자음을 빌려 적은 지명은 될수록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에 보기를 든 ‘구라파’나 ‘불란서’가 일본어나 중국어 발음으로는 원래 지명에 가깝게 발음되겠지만, 우리 한자음으로는 정확한 발음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구라파는 ‘유럽’으로, 서구는 ‘서유럽’으로, 동구는 ‘동유럽’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프랑스를 불란서, 네덜란드를 화란으로 부르는 것도 고쳐야 할 것이다. 우리말 발음 체계와 이를 표기하는 한글은 세계 어느 지명이라도 거의 원음에 가깝게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
권재일/서울대교수·언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