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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말 사랑, 문학은 '말꽃'이다

토박이말 사랑, 문학은 '말꽃'이다 [서평] <말꽃타령> 김수업의 우리말 사랑 이야기 ▲ 책 표지 김수업의 책 "말꽃타령" 표지 ⓒ 김영조 “옛날 어느 마을에 문자 쓰기를 몹시 좋아하는 선비가 살았다. 어느 날 처가에 가서 자는데 밤중에 범이 와서 장인을 물어 갔다. 집안에 사람이라고는 장모와 내외뿐인 터이라, 어쩔 수 없이 선비가 지붕에 올라가 소리쳐 마을 사람을 불러 모았다. '원산대호가 근산 래하야 오지장인을 칙거 남산 식하니 지총지자는 지총 래하고 지창지자는 지창 래하소! 속래 속래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먼 산 큰 범이 와서 우리 장인을 앞산으로 물고 갔으니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들고 나오고 창을 가진 사람은 창을 들고 나오십시오! 어서요. 어서!' 뜻인즉 이렇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누가 총이며 창을 들고 뛰어나올 것인가?” 위 글은 <김수업의 우리말 사랑 이야기 말꽃타령>에 나오는 대목이다. “범이오 범! 범이 우리 장인을 물어갔오! 어서 나와 보시오”라고 하면 될 것을 문자를 좋아하는 선비가 잘난 체 하는 것을 비꼰 말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지금 우리말교육대학원장,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를 하는 김수업이 쓰고, 지식산업사가 펴낸 이 책의 내용은 바로 “토박이말 옹호” 바로 그것이다. 책에서 지은이는 “문학이 아니라 말꽃이다”라도 강조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문학’이란 낱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서른 해를 넘도록 마음이 괴로웠다고 실토하면서 이 ‘문학’을 대신할 좋은 말이 없을까고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생각해낸 것이 “말꽃”이라는 것이다. 그는 같은 예술인 ‘문학’, ‘미술’, ‘음악’들에 왜 다른 뒷가지를 붙여 말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글로 하는 예술에 배울 ‘학(學)’자를 붙여 ‘문학(文學)’이라고 하고 그림에는 꾀 ‘술(術)’자를 붙여 ‘미술(美術’)이라고 하고, 소리에는 풍류 ‘악(樂)’자를 붙여 ‘음악(音樂)’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찔레꽃과 패랭이꽃, 살구꽃과 복숭아꽃, 참꽃과 개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불꽃과 눈꽃에다 꽃수레와 꽃구름까지 우리 겨레는 아름답고 값지고 사랑스럽고 종요로운 것을 <꽃>이러 불러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하면서 문학은 학문이 아니라 말로 하는 아름답고 값지고 사랑스럽고 종요로운 예술이니 '말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근대에 새로 생긴 말들에서 토박이말로 만든 ‘말본’, ‘세모꼴’, ‘그림씨’는 낯설다는 트집을 잡아 몰아내고 한자말인 ‘문법’, ‘삼각형’, ‘형용사’는 낯설다는 트집을 잡지 않아 모두가 쓰고 있다며 트집 잡지 않은 말들이 일본말이나 서양말들에서 가져왔기 때문은 아닌지 묻는다. 그는 토박이말에 관한 한 절대적인 사랑을 한다. 물론 국어교육학과에서 공부할 때부터인 토박이말 사랑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더욱 깊어졌다고 고백한다. 1981년 이탈리아에 갔다가 급성간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졌는데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인 고등학교 3학년 마씨모가 회진온 의사와 병상일지를 바탕으로 토론을 벌였는데 의사가 몰리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마씨모가 의사를 공격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병상일지가 누구나 알 수 있는 토박이말로 쓴 덕에 퇴원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병원들의 병상일지가 의료진 외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말로 쓰여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견주어 참으로 답답했다는 것이다. 책에는 토박이말과 라틴말의 싸움에서 토박이말이 승리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탈리아도 원래는 지식인들이 라틴말만 썼었다. 그런데 13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프란체스코라는 성인이 라틴말이 아닌 이탈리아말로 <태양의 노래>를 써서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 이후 프란체스코 성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단테가 라틴말로 쓴 <토박이말 옹호>를 지식인들을 향해 쓰고, 이탈리아말로 불후의 명작 <신곡>을 써냈으며 이후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이탈리아말 노래와 이야기가 뒤따라 나오자 라틴말 대신 이탈리아말로 예술과 학문을 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1680년 즈음 개선문 머릿돌에 새길 글을 라틴말로 써야 하느냐 프랑스말로 써야 하느냐 하는 논쟁이 일어났는데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라틴말을 옹호했지만 샤르팡티에가 <프랑스말의 뛰어남>이란 책으로 맞섰다. 그 뒤 1687년 페로가 루이 14세 임금 앞에서 프랑스말로 지은 <루이대왕의 세기>를 소리 내어 읊조린 것이 빌미가 되어 큰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학술원의 창피라며 펄펄 뛰었던 학술원 원장 봘로가 페로에게 잘못을 비는 편지를 써보내면서 프랑스말의 승리로 끝나 프랑스에서도 라틴말이 아닌 프랑스말로 학문과 예술을 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금 이탈리아는 의무교육인 초·중등학교와 직업고등학교까지는 라틴말이 끼어들지 못한다고 한다. 라틴말은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없는 어려운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은이가 존경하는 한 신부가 이탈리아에서 학위논문을 쓸 때 가장 많이 지적을 들은 말은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쓰라”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곁들인다. 책에 이런 이야기들을 쓴 지은이는 초등학교 교육에 영어가 중요하게 끼어든 것은 물론 영어도시 만드는데 1조 원을 쓴다는 우리나라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려는 뜻을 내내 숨기지 않는다. 지은이는 또 지구 가족의 시대로 들어섰으니 우리말 대신 미국말을 쓰자고 하는 사람들도 꾸짖고 있다. 그렇게 되면 지구라는 땅 위에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던 온갖 꽃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키 큰 해바라기만 온통 가득하고 저마다 신비스러운 모습을 지닌 짐승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오직 커다란 코끼리만 수두룩한 세상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 책에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토박이말 표현들을 보여주고, 한자말 없이 토박이말로 학문 할 수 있음도 증명하고 있다. 거기에 한자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지적하고, 정부의 국어정책에 대한 훈수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구청에 적어 내는 서류가 어려워 난로에 넣을 석유를 타가지 못한 노인이 얼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에 불꽃이 번쩍 난 영국의 크리시 마허 여사는, 직장을 버리고 나와서 ‘쉬운 영어 운동’을 벌여 임금한테서 귀족 칭호를 받았다. 쉬운 말이야말로 평등과 인권의 바탕이며, 주춧돌임을 너무도 잘 아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받는 대우다”라며 책을 맺는다. 어떤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한글, 한국말을 잘 안다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어쭙잖게 약간의 한자와 영어는 알아도 우리 아름다운 토박이말은 잘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세계에 당당해질 수는 없음이다. 2008년 새해를 맞아 우리는 이 책을 읽고 김수업 선생의 토박이말 사랑에 함께 해보면 어떨까? ============================================================================== "참 선비는 사람들이 모두 복되게 살도록 애쓰는 사람" [인터뷰] <말꽃타령> 지은이 우리말교육대학원장 김수업 ▲ 대담 중인 <말꽃타령> 지은이 김수업 ⓒ 김영조 - 어떻게 우리말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으며, 토박이말 전도사를 하게 되었나? "고등학교를 농림학교로 갔는데 어머니는 내가 농사짓는 걸 보지 못하겠다며 속상해 하셨다. 그래서 친구 아저씨인 경북대 교수님의 권유로 사범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서당 훈장이었던 분께 동몽선습까지 배운 나는 당시 초등학교 국어는 한문이 중심이어서 배울 게 없었을 정도였고, 그 기억 때문에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그것이 이 길로 들어선 계기다. 그 뒤 논문을 쓰는데 서론, 결론이란 말을 쓰기가 싫어 머리말, 마무리라고 쓰고, 한자 없이 한글로만 썼더니 주변 학자들 사이에 ‘한글전용을 옹호함’과 ‘한글전용을 박함’이란 논쟁이 벌어졌고, 욕을 많이 먹었다. 또 심사를 맡은 교수님은 한자를 안 썼다고 심사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한글을 잘 아시면서도 한글로 써서 심사를 못 하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두 달을 싸웠다. 그러다 나는 ‘학자는 신념이 없으면 장돌뱅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교수님의 말을 들이대며 ‘나는 한글을 쓰는 것이 신념이다’라고 했더니 교수님은 결국 손을 들었다. 이후 나는 한글과 토박이말 쓰기가 삶이 되었다." -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말에 대한 사랑보다는 영어도시를 만들려고 1조 원, 700~800억 원을 쓴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막고자 시민운동을 하지만 쉽지 않다. 이를 어쩔 것인가? "식민지 나라 말고는 영어 사랑이 유독 강한 곳이 한국인데 막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문을 한 사람들이 대대로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때 당나라 유학생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었고 이후 고려, 조선에 오면서 이어졌는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이것은 피 속에 용해되어 유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먼저 국어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좀 달라질 것이다. 또 나라의 국어정책기관인 국립국어원을 지금 상태로 두지 말고 국립국어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하나로 묶어 대통령 직속의 한국 문화와 한국어 정책을 아우르는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 미국을 따라가면 그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음을 온 국민이 깨닫도록 하는 것이 종요롭다." - 어떤 이는 훈민정음이 가림토문자를 표절한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한자도 우리 겨레가 만든 글자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생각을 말해달라. "어떤 역사적 주장이 설득되려면 돌·가죽·종이 따위에 새겨진 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 가림토문자는 20세기에 쓴 책에만 등장할 뿐이어서 실제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얘기 아닐까? 한자도 우리 겨레가 만든 글자라고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고대 한자 연구의 한국 내 최고 권위자인 영남대 유창균 교수는 ‘갑골문자는 동이족 곧, 우리 겨레가 만든 글자일 테지만 그를 중국의 한족(漢族)이 가지고 가서 발전시킨 것이 한자이기 때문에 한자를 우리 것이라고 하기는 무리가 있다’라고 한다. 유 교수의 이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갑골문자의 발견 경위와 허신의 설문해자, 한자 그리고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등에 대한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같이 자리를 했던 목원대 김슬옹 겸임교수는 그동안 별로 경험이 없었던 정말 대단한 공부였다고 털어놓는다. - 현재 나라의 표준으로 되어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문제가 많다고들 한다. 또 맞춤법, 외래어표기법도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듣는다. 국립국어원 국어심의위원장으로서 이에 대한 생각은 무엇이고, 이를 바로잡을 방법은 없는가? "나도 <표준국어대사전> 등에 문제가 많다는 데에는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래서 국어심의위원장을 맡은 나는 국립국어원에 많은 주문을 했고, 이상규 원장도 취임한 이후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공무원의 속성 때문인지도 모르는데 국립국어원을 개혁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선생은 이 시대의 선비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선비는 무엇이고, 이 시대에 맞는 선비상은 무엇인지 선생의 생각을 말해달라. "칭찬인지 아니면 더 잘하라는 채찍인지 모르겠다. (웃음) 선비란 분별력이 뛰어나고 이런저런 사정을 잘 알아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좋은 생각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또 참 선비가 되려면 어디에 마음이 얽매이면 안 된다. 하지만, 인간은 얽히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더욱 종요로운 것은 삶의 기본적인 노선이 선을 지향하고 있어야 하며, 할 수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복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본래 맹자가 한 말인데 선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으로 선비의 기본적인 덕목일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은 주문을 했나?(웃음)" 우리는 여기에 담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몇 년 강의를 한꺼번에 듣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선비가 이 시대에 더 많이 나와야 우리나라가 밝아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