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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허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語錄展) 보기 17 >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서간도 벌판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온 구십평생 되돌아봐도

여한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연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달픈 발자국이었긴 하나

큰일 하신 어른들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다.

                               -허은 지음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가운데서-

 

   
 

*허은 (許銀, 1907.1.3-1997.5.19) 여사는 누구인가?

 “서간도의 추위는 참으로 엄청나다. 공기도 쨍하게 얼어붙어 어떤 날은 해도 안보이고 온천지에 눈서리만 자욱하다. 하늘과 땅 사이엔 오로지 매서운 바람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만주벌 혹한을 기억해내는 허은 여사가 남긴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만주 일대에서 추위와 배고픔에도 굴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던 수많은 애국지사와 동포들의 이야기가 꺾이지 않는 생명력의 들풀처럼 잔잔히 펼쳐져 있다.

 허은 여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대통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이자, 이병화 독립투사의 아내이다. 또한 한말 의병장이던 왕산(旺山) 허위 집안의 손녀로 190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아버지 허발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 3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8살 때인 1915년 음력 3월 15일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배고픔과 굶주림이 기다리는 서간도로의 긴 여정에 올랐다. 그것은 독립운동을 위한 투쟁의 첫걸음이었지만 여덟 살 소녀가 이해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열여섯 살 나던 1922년 늦가을 흰 눈송이가 펑펑 내리던 날 하얼빈에서도 천 리나 떨어진 영안현 철령허 친정을 떠나 2천8백 리나 떨어진 완령허 화전현으로 시집갔지만 기다리는 것은 역시 가난과 끝없이 몰려드는 독립군들의 내왕이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삼시 세끼가 녹록치 않았다. 점심준비를 위해 어느 땐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마당의 땡볕에 앉아서 맷돌로 가루를 내어 반죽해서 국수를 해먹었는데 고명거리가 없어 간장과 파만 넣었다. 양식이 없던 어느 해는 좁쌀도 없어 뜬 좁쌀로 밥을 해먹었는데 그것으로 밥을 해놓으면 색깔도 벌겋고 곰팡내가 나서 아주 고약하다.”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나선 여성들의 삶은 끼니때가 가장 고역스러웠다. 그것은 허은 여사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상해 뒷골목에서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주워 독립군의 밥 수발을 해대던 김구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그랬고 우당 이회영 부인 이은숙 여사도 입쌀밥은커녕 곰팡내 나는 좁쌀 밥조차 배불리 해먹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 데서 당시 망명자들의 극심한 식량난을 이해할 수 있다. 끼니를 때울 식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땔나무도 부족했던 시절이라 가장이 독립운동 하러 나간 집에서 이러한 일들은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육체노동에 허은 여사는 급기야 쓰러졌다.

 “시집온 다음해에 한번은 감기가 들었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를 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얼른 부추겨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다음날도 못 일어났다. 그때가 열일곱 때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집안에 밀려드는 독립투사들을 건사해야 하는 일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독립군이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회의를 했다. 3월 초 이 집으로 이사 오고부터 시작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회의가 섣달까지 이어졌다. 서로군정서는 서간도 땅에서 독립정부 역할을 하던 군정부가 나중에 임시정부 쪽과 합치면서 개편된 조직이다. 통신원들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춥고 덥고 간에 밤낮으로 우리집을 거쳐 갔다. 전 만주 정객(政客)들 끼니는 집에서 해드릴 때가 많았고 가끔 나가서 드실 때도 있었다. 이때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사서 대량생산을 했다. 나도 옷을 숱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도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 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독립군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옷을 지어 공급했으니 그것은 이미 개인사를 뛰어넘은 독립운동사의 생생한 기록인 것이다. “1910년대 서간도에서 여성문제에 관하여 써놓은 자료는 드물다. 남성중심의 사회이자 준 전투적 집단이어서 주로 일반 주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였거니와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서중석 교수의 말처럼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 이러한 자료들이야말로 편향된 남성들의 독립운동에서 시각을 돌려 여성들의 숭고한 독립운동사를 되새길 소중한 자료가 아니고 무엇이랴!

 99칸 고래 등 같은 집을 놔두고 빼앗긴 국권을 찾아 만주 허허벌판의 풍찬노숙 속에 식구들을 보듬어야 했던 이 시대의 여성들은 그러나 광복된 조국에서 또다시 역사의 뒤안길에서 허덕여야 했으니 이를 시대상황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요, 독립운동 가족에 대한 푸대접이었다.

 “초상 때도 식구들은 굶고 있었다. 초상 당하고 법이한테라도 알린다고 애들을 보냈더니 보리쌀 한 말 하고 장과 밴댕이젓 조금을 보내주었다. 송장은 한쪽에 뻐들쳐 놓고 그걸로 보리쌀 한 솥 삶아 발 뻗고 애들하고 먹었다. 그러고 나니 눈이 조금 떠지더라. 목숨이란 게 참으로 모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여 년을 만주벌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귀국한 남편은 모진 고문 등으로 병을 얻어 약한 첩도 못해 먹이고 1952년 6월 8일 46살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남겨진 것은 올망졸망한 아이들과 장례 치룰 관하나 살돈도 없는 가난이었다.

 “원수의 육이오 / 피난처 충남에서 / 남편이 병사하니 / 미성년 형제자매 / 누세 종택 큰 문호(門戶)를 / 내 어찌 감당 하리 / 유유창천(悠悠蒼天) 야속하고 / 가운(家運)이 비색(悲色)이라” 허은 여사가 예순여섯에 지은 노래 ‘회상’에는 얄궂은 운명 속을 헤쳐 나온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꼿꼿한 선비 집안의 어머니요, 아내요, 며느리로 흔들림 없는 삶을 살다간 허은 여사의 삶이야말로 광복된 조선을 있게 당당한 독립군의 삶 그 이상이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