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남대문시장에 있는 상동교회,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74]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대문시장에 가면 남대문로에 접하여 복잡한 시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하얀색 12층 건물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4층까지는 새로나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그 위로는 상동교회지요. 상동교회의 내력을 잘 모르는 분은 왜 이리 복잡한 시장통에 교회가 들어서 있지?”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상동교회는 1888(고종 25)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교회입니다. 스크랜튼 선교사가 의료선교를 위하여 한성부 회현방 상동(尙洞)에 터를 구입하여 약국과 병원을 차리면서 오늘의 상동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벌써 교회 역사가 127년이나 되었네요. 그러니 남대문시장이 상동교회 보고 왜 남의 구역에 들어와 장사 방해하느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상동교회는 단순히 역사 오랜 개신교 교회라는 것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동교회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이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당시 상동교회에서 믿음과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전덕기(1875~1914) 목사입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입교하였습니다 

 

   
▲ 190년대의 상동교회(완쪽), 상동교회를 독립운동의 산실로 만든 전덕기 목사

전덕기는 같은 해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는데, 독립협회의 목적이 기독교 복음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그의 신앙은 민족독립운동과도 직결됩니다.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튼의 목회 활동을 돕던 전덕기는 1902년 전도사가 되자 본격적으로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1904년에는 교회 안에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이를 청년들의 신앙과 독립운동의 교육기관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엡웰청년회, 지금으로 치면 전국감리교청년연합회를 소집하여 을사늑약 무효 투쟁도 전개하고요.  

1907년 전덕기는 드디어 목사 안수를 받고 상동교회의 제6대 담임목사가 됩니다. 당연히 전목사는 상동교회를 더욱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지요. 전목사는 같은 해 이준과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밀사 계획을 추진하여 성사시켰고, 한일합방 초기 민족독립운동의 핵심이었던 신민회 조직에도 중심 역할을 합니다.  

결국 전목사는 1912년 일제가 신민회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습니다. 일제는 존경받는 전목사가 감옥 안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전목사를 보석으로 석방하지만, 전목사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14년 돌아가십니다. 

상동교회 얘기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에 우당 이회영 선생이 있습니다. 삼한갑족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던 우당의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일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이번에 영화 암살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신흥무관학교가 바로 우당 형제들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이지요 

 

   
▲ 상동교회 학감을 지낸 우당 이회영 선생, 전 재산을 팔아 독림운동을 했다.

이렇게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우당 선생이 조선이 망해갈 무렵 상동교회 학감(學監)을 하면서 청년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당기념관에 가면 당시 우당이 사용하던 찬송가책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진 찬송가책을 보면서 제가 존경하는 우당 선생이 믿음에 있어서도 제가 본받을 만한 분이라는 것에 가슴 벅차오르게 기뻤었지요.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린 전덕기 목사님의 을사늑약 무효 투쟁이나 헤이그 밀사 파견 추진 등에는 우당도 전목사와 같이 하였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에는 고아로 숯장사를 하다가 목사가 된 전덕기와 우당 이회영과는 신분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당은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전목사와 가장 친한 동지가 되었지요. 우당은 자신의 정치 이상이 만인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자유 발전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기독교의 정신이 자신의 정치 이상과 부합한다고 보았기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우당이기에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할 때에 상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교회는 상것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치부하던 때인데, 이런 교회에서 사대부가 그것도 명문거족의 자제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웬만한 믿음이 없고서는 힘든 일이었지요. 이런 우당이기에 여동생이 일찍 청상과부가 되자 홀로된 여동생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겨 여동생이 죽은 것처럼 장례를 치르고, 비밀리에 여동생을 먼 곳으로 재가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것뿐인가요. 만주로 떠날 때에는 집안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켜주기도 하였구요. 

위에서 전목사님이 이준 열사와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밀사 계획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준 열사도 당시 상동청년회 회장이었습니다. 믿음과 민족독립정신으로 충만했던 이준 열사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서 열강들이 약소국의 피를 토하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잘 아시다시피 이준 열사는 분한 마음에 기혈이 막히고 병이 생겨 분사(憤死)하였지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이런 이준 열사를 모두 존경할 것입니다 

 

   
▲ 서울 수유동 이준 열사 묘역

그런데 대한민국 검찰은 이런 이유 이외에도 이준 열사를 대한민국 1호 검사, 그것도 권력에 아부하지 않은 대쪽 같았던 검사로 더욱 존경합니다. 이준 열사는 189511월 무렵 법관양성소를 제1회로 졸업한 초대 검사였는데, 평소에 상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이런 올곧은 행동 때문에 1896년 검사시보로 임명되었으나 한 달 만에 면관되었고, 1906년 다시 검사로 임관된 후에도 상관을 고소하였다고 하여 재판을 받고 19073월 무렵 파면됩니다.  

대한민국 검찰이 이준 열사를 대한민국 1호 검사로 존경할 만 하군요. 한편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에는 헤이그에 이준 기념교회도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도 상동청년회에서 청년운동을 하였고,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이렇게 4분이 상동교회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동교회이니 일제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겠지요? 일제는 전덕기 목사를 고문하여 죽게 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상동청년학원도 폐쇄시켰으며, 일제 말인 19443월에는 상동교회마저 폐쇄시키고 교회를 신사참배와 자기들이 떠드는 황도정신(皇道精神)의 훈련장인 황도문화관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인구가 1%도 안 되는 일본이니, 이런 일도 거리낌 없이 저질렀군요. 상동교회 건물은 6.25 전쟁 때도 많이 파괴되었는데, 지금 보이는 하얀 교회 건물은 1974년에 새로 세워진 건물입니다. 상동교회의 이런 훌륭한 역사를 모를 때에는 저도 그저 복잡한 시장통에 이런 교회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였고, 심지어는 교회가 남대문시장 안에 있다니, 너무 세속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오해까지 하였었지요.  

믿음과 민족 독립운동의 성소, 상동교회! 혹시 남대문시장 나갈 일 있으면, 하얀 상동교회에 눈길을 주고 상동교회의 독립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