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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아버지의 라듸오》, 아버지와 딸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79]

   
▲ 《아버지의 라듸오》, 김해수 지음, 김진주 엮음, 도서출판 느린걸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언제 나온 지 아십니까? 바로 1959년 11월 15일 금성사의 생산과장 김해수 님(1923 ~ 2005)에 의해 처음으로 국산 라디오가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김해수 님이 만든 최초의 라디오는 201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작년에는 ‘대한민국 광복 70년, 과학기술 70선’에 선정되었습니다. 그 김해수 님이 2003년 노환으로 점점 쇠약해지면서 자기의 인생을 글로 남겼고, 이를 딸 김진주 씨가 정리하여 2007년 《아버지의 라듸오》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올해 《아버지의 라듸오》가 과학의 달 특집으로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전파도 탔네요. 

김해수 님의 딸 김진주 씨는 박노해 시인의 아내입니다. 박노해 시인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한때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더니, 지금은 ‘나눔문화’라는 단체로 평화 나눔 활동을 하며 영성이 있는 시를 쓰고 있지요. 김해수 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포장을 수상한 산업화 시대의 주역임에 반하여, 딸 김진주 씨는 사노맹 사건으로 1991년 구속되어 4년간 형을 복역한 민주화 세대입니다. 산업화 세대의 아버지와 민주화 세대의 딸 사이에는 처음에는 아무래도 갈등이 많았겠지요? 

김진주 씨는 한 때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미워하였으나, 감옥에 있는 동안 아버지의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정국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체득한 기술의 진보를 통해 아버지가 우리 삶의 지평을 얼마나 밝게 열어 주었으며, 한 엔지니어로서 얼마나 고뇌에 찬 나날을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던가를 이해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아버지가 자리에 눕게 되자,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버지에게 권유도 하였던 것이겠지요. 

김해수 님은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으로 책상 속에는 항상 사직서를 써 놓고 원칙이 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금성사의 공장장, 기획부장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일체의 떡고물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김진주 씨는 아버지가 명절 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떡고물마저 사양하는 바람에, 집 대문 앞에 쇄도하는 선물 보따리를 돌려보내느라고 엄마가 진땀을 빼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딸인 자신이 아버지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만 안겨드렸던 것이 회한으로 쌓여 가슴을 아프게 한다고 하는군요. 김해수 님은 그런 자부심이 있었기에 머리말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역사 속의 많은 엔지니어들이 정직하게 원칙을 지키는 도덕적 자부심으로 낡은 경험과 관습적 사고에 맞서왔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내가 눈앞의 이익과 이권만 추구했더라면 오로지 우리나라 전자공업 발전에 필요한 기술의 혁신을 위해 과감히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겠는가.” 

책을 보니 김해수 님의 어린 시절은 악동이었더군요. 한 번은 누님들이 자고 있는 방에 몰래 들어가 누님들의 댕기머리를 서로 단단히 묶어놓고, 누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대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즐기며 자신은 모른 척하며 꿈나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똥을 예쁜 포장지와 끈으로 묶어 길에다 두고는, 이를 주워든 사람이 기대감으로 포장을 풀어보다가 놀라 자빠지는 것을 보고는, 멀리서 놀려대면서 도망치기도 하였답니다. 하하! 정말 악동은 악동이었네요. 

김해수 님은 1937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과학박물관 견학을 갔다가 에디슨의 발명품에 반하여 공업학교로 진학을 합니다. 이렇게 배운 김해수 님의 기술은 광복 이후에 요긴하게 쓰입니다. 사람들이 해방정국의 어수선함에 정보에 목말라 라디오를 찾을 때 김해수 님이 연 라디오 수리가게에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1946년 하반기에 들면서 좌우익 대립은 매우 전투적인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우익 청년단체인 ‘족청’이나 좌익의 ‘민청’이나 자기들 행사장 전기장치와 앰프시설 설치를 김해수 님에게 부탁합니다. 당시 민청에 가입하였던 김해수 님은 민청에서 뭐라고 하자, 의사가 좌우익 환자를 가려서 치료할 수 없듯이, 자신도 좌우익을 가려가며 기술을 쓸 수 없다며 어느 쪽이고 기술을 제공해줍니다. 

그런데 좌우익의 극한 대립의 현장에서 이념을 초월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무척 힘이 드나봅니다. 1947년 하동군청 방화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김해수 님을 비롯한 청년 4명을 방화범으로 단정하고 구속합니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가합니다. 이 사건은 애초 우익 청년들이 좌익 청년들을 모함하기 위해 경찰과 짜고 꾸민 음모였기에, 김해수 님은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고 무죄를 받지요. 그러나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하였던 두 사람은 옥중에서 죽었다고 하는군요. 김해수 님은 무죄를 받긴 하였지만 모진 고문에 폐결핵에 걸립니다. 그리하여 요양을 하기 위하여 소안도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6⋅25를 맞습니다. 

김해수 님은 소안도에 들어간 덕분에 목숨을 건지지요. 요양을 잘 하여 목숨을 건진 것도 있겠지만, 섬에 들어간 덕분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아시지요? 6⋅25 전에 이승만 정권은 좌익에 관계된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등록시켜 관리하여 왔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자 수많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합니다. 진상이 가려지지 않아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당시 20만 명 이상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다고 하는군요. 김해수 님의 친구 강대봉 씨도 이때 학살됩니다. 강대봉 씨의 여동생과 결혼할 만큼 친했던 김해수 님은 안타까운 마음을 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대봉이가 나 아닌 누구와 손목을 묶여서 트럭 위에 올랐을지, 그 순간 내 생각을 얼마나 했을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떠오르던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수려한 외모에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가슴이 크고 따뜻했던 내 친구 대봉이가 너무나 아깝고 그런 친구를 죽인 인간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요즈음 북한의 핵개발 때문에 시끄럽지요? 《아버지의 라듸오》에는 해군의 원자력 개발 프로젝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김해수 님은 소안도에서 부산으로 나와 다시 라디오 가게를 엽니다. 그런데 라디오 수리를 해주면서 알게 된 김일청이라는 재일동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해군 정보감실의 원자력 연구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답니다. 이 사람의 소개로 김해수 님은 실험에 필요한 특수 경화 유리제품들을 제작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진해의 해군 통제부로 갈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 전용의 피켓보트를 타고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진해 간을 왕래하였다는군요. 

해군 통제부 안에는 대통령 전용 낚시터가 있었는데, 그 낚시터 옆 녹색 창고를 ‘해군기술연구소’로 사용하였답니다. 김해수 님은 그 연구소에서 일본인 과학자를 만났는데, 그 과학자는 한국의 원자력 연구를 위해 납치되어 왔다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김해수 님이 계속적으로 연구에 관여하면서 정식 장교로 발령을 받게 될 무렵 원자력 개발 프로젝트는 갑자기 중단됩니다. 미군 정보기관이 이를 알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프로젝트가 중단된 것이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핵개발을 하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하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도 원자력 개발을 추진하였었나요? 《아버지의 라듸오》에서 이런 숨어 있는 역사도 읽을 줄은 몰랐네요. 

 

   
▲ 김해수 씨가 만든 국산 1호 "금성라듸오", '느린걸음' 제공

 1958년 김해수 님은 럭키화학이 새로 만든 금성사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959. 11. 15.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를 만들뿐만 아니라, ‘Gold Star'라는 로고와 금성사를 상징하는 왕관 모양의 마크까지도 만듭니다. 그러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미제 라디오나 일제 밀수품 라디오에 익숙해 있던 소비자들은 아직 최초의 국산 라디오에 손을 뻗지 않습니다. 이러한 국산 라디오에 일대 전기가 마련된 것이 김해수 님과 박정희 장군과의 만남입니다. 

어느 날 5⋅16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이 예고도 없이 금성사 공장을 방문합니다. 그날따라 김해수 님이 공장을 지키고 있다가 권력 실세 박정희 장군을 맞이하였는데, 여기서 김해수 님이 국산 라디오 판매의 애로점을 얘기합니다. 김해수 님의 호소는 곧 효과가 발휘됩니다. 박정희 장군이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을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이지요. 이런 신속한 정책을 펼치는 데는 독재자가 좋긴 좋군요. 

금성사에서 승승장구하던 김해수 님은 46살에 삼화콘덴서로 자리를 옮깁니다. 삼화콘덴서에서 김해수 님을 스카웃한 것이지요. 5년간 삼화콘덴서 전무로 일하던 김해수 님은 그 후 직접 사업을 경영하다가 64살에 현업에서 은퇴합니다. 그리고 김해수 님이 큰누님을 위해 지어드린 거제 이진암에 머물고 있는데, 일본인 가와다케 씨가 찾아옵니다. 여기서 김해수 님과 가와다케씨 사이의 인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김해수님은 삼화콘덴서 전무로 있을 때에 원자재 거래로 가와다케 씨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와다케 씨가 회사에서 억울하게 파면 당하자, 그에게 직접 무역상을 차리라고 하고, 그와 거래를 합니다. 김해수 님의 도움으로 회사를 크게 키운 가와다케 씨는 어느 날 김해수 님 앞에 통장을 내놓습니다. 김해수 님의 은혜를 잊지 못한 가와다케 씨는 그 동안 김해수 님 앞으로 통장을 개설하고 저축을 해온 것이지요. 그러나 김해수 님은 당신을 도운 것은 순전히 인간의 정의로서 한 것이지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라고 이를 거절합니다. 이런 김해수 님을 가와다케 씨는 더욱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겠지요? 

이런 가와다케 씨는 그때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1987년 김해수 님이 사업에서 실패하여 은퇴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거제도로 직접 찾아옵니다. 그리고 노인이 한가로우면 병이 난다고 소일거리를 가져왔다며, 전에 자기가 김해수 님 시키시는 대로 따랐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기를 따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후 김해수 님은 가와다케 일렉트로닉스의 한국 대리점인 신기상역 대표로 다시 현업에 복귀합니다. 그런데 가와다케 씨는 1996년 말 급성 혈관계질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답니다. 김해수 님은 그런 가와다케 씨 유골의 일부를 거제도 이진암 납골당에 안치해 놓고 그를 그리워하며 길이 기억하셨다는군요. 국경을 뛰어넘은 참 아름다운 우정이입니다.

김해수 님은 딸 김진주 씨와 사위 박노해 시인의 이야기로 자서전의 끝맺음을 합니다. 아버지로서는 이대 약대까지 나온 딸이 대학도 안 나온 노동자와 결혼한다는 것에 처음에는 당연히 실망과 당혹감, 분노감 등에 휩싸였겠지요. 그리고 어렵사리 둘의 결혼을 허락했지만, 그 뒤 노동운동 하는 딸과 사위 때문에 세무사찰까지 받습니다. 또한 딸과 사위가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되는 것을 보며, 해방 직후 좌우익 대립의 혼란과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던 자신이 다시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에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 김해수 씨와 외동딸 김진주 (1974년 아버지가 가꾼 신록의 정원에서), '느린걸음' 제공

 
그러나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뒤 2000년부터 딸과 사위가 ‘나눔문화운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을 보고, 딸과 사위가 뜻한 바를 이루고자 애쓰는 가운데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비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서나마 사랑하는 딸과 사위를 가끔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라듸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저도 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19살의 나이에 평양에서 훈련을 받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밀리자 갑자기 서울마포전투에 투입되어 포로가 되신 아버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으로 혈혈단신 남한에 내던져진 아버님, 그 뒤 어머님을 만나시고 험한 세월 세 아들을 키워내시느라 모진 고생을 하신 아버님! 제 아버님의 생애도 개인적 내력으로서나 그 시대의 역사로서나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일제 말기와 6⋅25 전쟁, 4⋅19와 5⋅16 그리고 산업화와 독재정치, 민주화 시대를 모두 거쳐 온 우리 아버님 세대 모두가 한 분 한 분이 그 격동의 시대를 직접 몸으로 쓴 역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님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바치며, 이제 《아버지의 라듸오》의 스위치를 끄렵니다.

 

   
▲ 김해수 씨가 노동운동을 하다 구속된 딸 김진주에게 보낸 친필 편지 (1991.4), '느린걸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