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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화보] 최치원의 체취가 남아 있는 해운대(海雲臺)

해운대 백사장의 큰 돌에 쓰여진 "해운대(海雲臺)" 글씨, 최치원 것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이 낳은 대문호 최치원은 신라말기인 857년 헌안왕 1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영특함이 있어서 선진 학문을 닦기 위하여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나이 12세 때로 868년이다. '최치원은 그의 호로 가장 많이 쓴 것은 고운(孤雲)이지만 그의 또 다른 호로 해운(海雲)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최치원은 어린 몸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뒤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니  당장 출세할 줄 알았으나,  당장 관직을 제수 받지 못하여 이국땅에서 2년 여 동안 중원을 유랑하면서 시와 부를 지으면서 떠돌이로 살았다. 그러니 직책이 없고 수입이 없어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러던 중 당의 정치적 혼탁으로 착취하는 관리들에 불만을 품은 "황소"가 난을 일으켜 당나라의 전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는 당 희종 원년으로 880년이다. 이때 생활이 궁핍하고 공부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절도사인 '고병'이 추천하여 그의 막하에 '관역순관'이라는 벼슬을 받고 관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고병'이 '황소의 난'을 진압할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최치원은 그의 '도통순관'으로 '종사관'이 되어 수장인 황소를 꾸짓는 격문을 지었다. 이 글이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이다.  최치원의 격문을 읽은 황소는 사실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책사가 격문을 읽어주는 것을 듣고서 그만 땅에 고꾸라졌다고 한다.  이처럼 난을 일으킨 본인이 감동할 수 밖에 없는 글을 지어서 황소의 난을 잠재웠던 토 황소격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 머리를 맞댈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너를 죽이려 의논하고 있다" (중간줄임) 이 격문으로 최치원은 당나라의 관군으로도 잠재우지 못하던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일등공신이 되어 중국 전역에 그의 문장을 날리게 되었고, 이후 여러 지방관직을 역임하다가 885년 헌강왕 11년 신라로 귀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29살 때의 일이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자신의 글재주로 왕실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많이 하면서 기타 비문과 찬문등을 지어서 자신의 문장을 날렸다.


그러나 신라는 골품제도가  철저하여 정해진 골품이상의 관직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그는 더이상 골품제의 벽에 부딪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라가 하대로 가면서 왕위 쟁탈을 위한 왕족간의 싸움으로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정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계책을 지어서 진성여왕에게 바쳤다. 이것이 '시무10조'인데 그런 상소는 귀족들의 반발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더이상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관직을 사직하고 세상을 유랑하다가 가야산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최치원은  태어난 해는 있으나, 그가 죽은 해는 모른다고 한다. 이렇게 세상을 등진 최치원은 세상을 주유하다가 이곳 해운대에도 오게 되었고,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자신의 또다른 호인 "해운"에 넓은 전망대를 뜻하는 대(臺)를 붙여 해운대라고 쓰고 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해운대의 유래가 되었다.

 

그가 썼다는 해운대 글씨는 동백섬의 동쪽 백사장 초입에 누워있는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많은 이들이 그져 스쳐지나가고 있다. 신라시대 대문장가 였고, 그 문장의 뛰어남으로 내노라는 당나라의 장군들과 병사들도 해결하지 못하던 골칫거리 황소의 난을 잠재웠던 그의 공적을 이제 후세사람들은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게 된 것이다.


고운 최치원은 한국의 유학자 중에는 거의 태두에 가깝게 섬기고 있다. 신라시대 원효의 아들인 설총에 이어 두번째로 올라 있다. 이들 두사람이 신라시대 동방18현에 들어있고, 이후 고려시대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나머지 14명은 모두가 조선시대 인물이 성균관 대성전 한국의 현인으로 모셔져 있다.... 고구려 백제에도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인데, 이들은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으니 아쉽기도 하다. 해운대를 돌아보며 문창후 최치원의 흔적속에 기록되지 않은 아쉬운 역사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시대에 서기 300년대 일본에 유학을 전해준 '왕인'박사 또한 우리의 역사책 속에는 한 줄 언급도 없고, 오직 일본의 역사책에 그이 위대함을 절절히 기록해 두었기에 이제야 우리가 그분의 이름이나마 알고 있다. 일본에나마 그에 대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왕인도 아직기도 그들이 우리의 선조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왕인박사는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지만 백제가 사라진 후 우리에게는 한줄의 기록도 없는 왕인박사이니, 우리의 역사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었더라면 그도 동방의 현인으로 추앙받아 당연히 문묘의 현인중 가장 먼저 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해운대는 많은 중국인들도 찾는 곳이라, 이처럼 중국과 인연이 깊은 사연을 담아 이야기로 전하는 해운대를 최치원과 연결하여 관광상품화에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 살아있을 때에는 자신의 원대한 뜻을 펴지는 못했지만, 먼 후세에게는그가 지나가면서 남긴 필적하나로도 큰 역사문화유적으로 자취를 남겨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으니, 당시에는 자신의 뜻을 펴지못하고 가야산의 산신령이 되었지만 자신의 웅대한 포부가 비록 풀지못한 한으로 남았더라도 이제는 다 풀고 극락왕생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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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