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2,000년 전에는 젠탄강의 일부였으나 진흙이 쌓여서 강줄기가 바뀌어 버린 이곳에 당나라 중기 덕종(785~804) 치세에 백거이가 항저우에 임명되자, 백거이는 옛날 있던 제방들을 수리하고 둑을 더욱 견고하게 쌓아서 큰 호수를 만들어 가뭄에도 농사에 전혀 걱정없는 큰 호수를 만들었다. 백거이는 공사를 감독하면서 날마다 산책하고 호수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호수 주변을 가꾸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백거이가 만들었다고 하여 백제(白堤)이고 당나라가 기울고 이후 200년이 지나 송나라 철종(1086~1094) 년간에 당송 팔대가로 유명한 소식(소동파)이 항저우에 임명되었는데 가뭄이 들어 농민들이 크게 고생을 하였다. 그 이유는 제방을 잘 가꾸지 않아 바닥에 진흙이 침전되고 호수에수초들이 너무 자라서 물을 대기도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소동파는 바닥의 침전물을 모두 파내고 기존의 백제보다 3배나 더 크게 만들었다. 이를 소동파의 성을 따서 소제(蘇堤)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호는 넓기도 하지만 주변에 아름다운 절경들을 많이 갖고 있으며 서호10경이라는 명소들이 있다. 주변에는 역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왕조가 문을 닫고,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중국에 대한주종관계를 청산하였다. 이는 다분히 일제가 중국의 간섭에서 벋어난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충동질도 있었지만, 어떻든 대한제국은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국으로 그것도 황제국으로 일신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이름만 바꾼다고 기울어 노쇠하고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리던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나라를 살리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고,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많은 대신들은 백성도 속이고 황제도 속이면서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하여 이들은 일본정부로부터 후작 백작 등의 작위를 받고, 또 나라를 팔아먹은 공로로 전국 곳곳에 토지를 할양받았다. 이들이 다름 아닌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장관 대신등 친일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받은 각종 작위와 관직 그리고 할양받은 토지들에서 나오는 재물로 자식들은 해외로 유학을 보내서 대를 이어 부와 명예와 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중국의 개항기 중심지 상하이를 방문했다. 상하이는 중국 처음 개항지로 초기에 유럽 각국들이 중국 정부로부터 토지를 분할받아 자신들 나라마다 독특한 건축물들을 짓고 살면서 중국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많이 들어서게 하였다. 그래서 옛 도심에는 지금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양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각국의 지역마다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중국의 주요 지역들이 일본의 손에 넘어갔지만 서양의 조차지역에서는 일본군경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였기에 한동안대한민국의 임시정부도 상하이의 프랑스 조차지역에 있을 수 있었다. 이런 서양사람들의 개발로 성장해온 상하이는 1850년 경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현재 인구가 3000만에 이른다고 한다. 황포강이 동서로 흐르는 상하이 발전의 상징은1994년 완공된 동방명주다. 동방명주는 높이가 468m 에 이르는 거대한 탑으로 아랫부분은 3개의 거대한 경사기둥이 커다란 구슬을 떠 받들고 있으며,두개의 구슬이 위 아래로 있고, 그 구슬의사이를 3개의 거대한 수직기둥이 연결하고 있는 형상이며, 구슬의 윗 부분부터는 체감되면서 올라간 첨탑이뾰족하게 올라가 있다. 처음 황포강 강변에 동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름이 깊어가고 장마철이 한창인 7월 중순 습기 잔뜩 머금고 비가 간간이 내리는 날 제주 교래리자연휴양림내 곶자왈을 탐방했다. 곶자왈이란 제주의 방언으로 남방한계식물과 북방한계식물 나무와 덩쿨식물들이 화산암반지형이 함몰과 돌출로 무질서하게 반복되는 곳에 생태계가이루어져 다양한식물들이뒤엉켜서 자라는 독특한 숲으로 제주도 말로는 어수선한 숲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제주에는 이러한 숲이 여러곳 있는데, 잘 알려진대표적으로 4곳이 있다. 그 4곳을 살펴보면 한경-안덕곶자왈 지구, 애월곶자왈지구, 조천-함덕 곶자왈지구, 구좌-성산곶자왈지구이다. 곶자왈지구는 화산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지하수가 풍부하여 보온 보습의 효과가 뛰어나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이 형성된 곳으로, 더불어 동물들도 먹을 것이 많이 있어 살기 좋은 곳이 되어, 제주인들은 이곳을 말목장으로 활용도가 컷던 숲이기도 하다. 조천-함덕지구에 속하는 교래자연휴양림내 곶자왈 숲속에는 고생대부터 지구상에 사라고 있는 크고 작은고사리류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으며,개발되지 않은태고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포항 북구 송라면에 있는 내연산 보경사를 찾았다. 보경사는 창건연대가 602년으로 14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보경사를 창건한 스님은 통일전 신라지명스님으로 스님은 신라 진평왕 때 중국의 진나라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때는 중국도 수나라로 통일 전에는 많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전란의 시대로 위진남북조시대였다.그 때 진나라의 어떤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을 전수받았다. 그런데 그 도인은 신라 땅 동해안 명산을 찾아 명당에 터를 잡고, 자신이 전해준'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절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삼국이 통일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지명스님은 이런 '팔면보경'을 전수받고 전해들은 사연을 진평왕께 고하자, 진평왕은 크게 기뻐하며 동해안 명산을 물색하던 중내연산 아래가 명당터임을 알고, 산아래큰 연못 속에 지명스님이 전해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흙으로 메워 터를 다진 후금당을 세우고 그 절 이름을 보경사(寶鏡寺)라 이름하였다. 즉 '팔면보경'을 묻고 그 거울의 신비한 힘과 부처님의 위신력에 국태민안과 삼국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스며있는 절이 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옛날 포항은 영일만 바다에 5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섬의 이름은 상도, 하도, 분도, 죽도, 해도였다. 포항은 비록 길지는 않지만 동해로 흐르는 형산강과 영일만이 만나는 삼각주로, 영일만 아래에에는 형산강의 물을 따라 흘러든 퇴적토가 쌓여서 5개의 섬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포항은 신라시대부터 고기잡이 배들이 드나드는 천혜의 항구였는데, 항구가 번성하자 1831년 포항창진으로 승격되면서 조선 동남지역어업과 물자교역의 중심항구가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근대어업기술을 받아들여 영일만 일대의 청어와 정어리를 잡는 수산업 전진기지로 번성하여 국내 최대 청어와 정어리 집산지가 되었었다. 그로 인하여 1930년 대에는 청어와 정어리를 가공하는 인부들과 노동자들로 수 천 명이 생업을 이어가는 지역경제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포항은 광복이후 6.25 전쟁발발이후 한동안군사기지항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1962년 국제개항장으로 지정되어 국제적 항구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후 농수산물의 운반선들이 드나들고 동해에 떠있는 울릉도로 정기여객선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적도를 지나는 태양의 고도에 맞추어 땅의 열기가 높아가는 무더운 날 2016년6월26일 일요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국회 주변대부분 상가도 철시하고 쉬는 날 우리의 뿌리 역사가 왜곡되었다며 이를 바로잡는데 힘이 되고자 나선2천여명의 국민들이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 가득 모였다. 보통사람들이라면더운 여름 시원한 산이나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을 좋아할 때인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더위를 피하여 산과 계곡으로 가지 않고, 또 1주동안 쌓인 피로를 집에서 편히 쉬면서 충전하지 않고,피곤한 몸으로 한적한 국회의원회관큰 회의실을 가득 메운채 열기를 내뿜고 있는것일까? 기자는 범상치 않은 모임이 무척 궁금하여 1주동안 피로로고단한 몸을 이끌고 찾아보았다. 국회의원회관에 가보니 이 모임의 이름은 약칭"미사협"이라는 모임으로 전국에서 모여든중장년의 인사들로우리의 바른 역사를 알고자 각자의 위치에서 틈틈히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미사협"을 다시 풀어쓰면 "미래로가는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협의회"로 한겨레의바른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배움으로써 훌륭했던 조상의 슬기를 이어받아밝은 미래한민족의 역사를 후세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통일이전 신라 지역인 이곳 포항에는 600년대 지어진 오어사(吾魚寺)가 있다 이 절은 당시에는 항사사(항沙寺)라 했다고 한다. 항사사라 불리던시절에이곳 계곡에서원효스님과 혜공스님이 자신들이 터득한 법력을 서로 자랑하기 위하여 누가 죽은 물고기를 살릴 수 있는지 내기를 했다고 한다. 두 스님은죽은 2마리 물고기를 계곡에 넣었는데,한 마리는 그냥 그대로 죽은채 있었고, 신기하게도 한 마리는 힘차게 살아서 헤엄쳐 갔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본 두 스님은 죽은 물고기는 상대방 물고기이고,살아난 물고기가 자신이 살린 물고기라고 서로외쳤다."저게 내 물고기다" 그 사연이 오늘의절이름으로 지어져 오어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 때문에 절의 이름도 특이하지만 그 이야기도 또한 재미있다. 불가에서 육고기를 먹지 않는것은, 고기속에 들어있는영양분의 필요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같이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다른동물을 자신의식욕을 충족시키기위하여 죽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더 의미를 확장해보면, 태어난 모든 존재는 살고자 하는 욕망속에 살아가는 것인데, 아무리 미물이라 하더라도 그 미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이 낳은 대문호 최치원은 신라말기인 857년 헌안왕 1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영특함이 있어서 선진 학문을 닦기 위하여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나이 12세 때로 868년이다. '최치원은 그의 호로 가장 많이 쓴 것은 고운(孤雲)이지만 그의 또 다른 호로 해운(海雲)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최치원은 어린 몸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뒤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니 당장 출세할 줄 알았으나, 당장 관직을 제수 받지 못하여 이국땅에서2년 여 동안중원을 유랑하면서 시와 부를 지으면서 떠돌이로 살았다. 그러니 직책이없고 수입이 없어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러던 중 당의 정치적 혼탁으로 착취하는 관리들에 불만을 품은 "황소"가 난을 일으켜 당나라의 전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는 당 희종 원년으로 880년이다. 이때 생활이 궁핍하고 공부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절도사인 '고병'이 추천하여 그의 막하에 '관역순관'이라는 벼슬을 받고 관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고병'이 '황소의 난'을 진압할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최치원은
[우리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신록이 우거지는 푸른 6월 기자는 한겨레의 옛 역사유적을 찾아서 6천~7천만년 전에 화산의 분출로 이루어진 부산의 큰 산 장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지내던 천제단을 참배 했다. 천제단이란 말 그대로 하늘에 대한 공경의 표시로 1년에 의미있는 날(이곳에서는 정기적으로 1월 3일과 6월 3일)에 제사를 지냈던 조상들의 제단이었다. 정기 제사 외에 갑자기 닥친 각종천재 지변이 있을 때에도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면서,사람이 잘못 한 일 등에 대하여 반성의 마음으로마련한 제물을 바쳐 참회 하면서 하늘의 노여움을 풀려했던 제단이다.그 대표적 재난으로 가뭄이 심할 때에는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던 것이 기우제이다. 이렇게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은 고래로부터 이어져 오던 한겨레의 민족사상이었으나, 조선이 들어선 이래 황제국의 지위를 중국에넘겨준 이후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을 공식적으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간혹 조선조에도 하늘에 제사지낸 임금들이 있었지만, 이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조선은 개화기 청일전쟁 이후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