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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장수의 위엄이 보이는 지운하의 상쇠놀음

[국악속풀이 294]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남사당(男寺黨)> 출신의 유랑 예인, 지운하 명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남사당, 또는 남사당패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다. 남사당패란 다양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단체를 이루고, 전국을 돌며 민중들과 함께 애환을 함께 해 온 집단이란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그들의 재주는 첫째가 풍물놀이이고, 둘째는 버나돌리기, 셋째는 살판, 넷째가 어름 곧 줄타기, 다섯째가 덧뵈기라고 부르는 탈놀음이고 여섯째가 꼭두각시놀음 곧 인형극이다.

 

풍물놀이란 꽹과리를 비롯하여 장고, , , 쇠납(일명 날라리) 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동네에 남사당패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린 다음, 둘째 버나 돌리기를 선보이고 셋째는 살판 곧 체기(體技)놀이인 땅재주를 넘고, 넷째가 줄타기이다. 줄꾼의 창이나 대사, 어릿광대의 구수한 입담, 그리고 악사들의 경쾌한 리듬과 가락 등이 합작으로 이루어지며, 다섯번째는 덧뵈기라고 부르는 탈놀음, 곧 탈춤이 이어지는데, 탈을 쓰고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춤과 노래, 대사로 풀어나가는 순서가 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이 꼭두각시놀음, 즉 인형극이란 이야기를 하였다.

 

풍물놀이로 잔뼈가 굵은 지운하 명인은 이 남사당에 들어가 조직의 가장 아래 그룹인 <삐리>생활부터 시작했으며 놀이를 통해서 끼니를 연명해야 하는 그 학습 자체가 한과 설움의 세월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지운하의 판굿 중 상쇠놀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

 

지운하의 상쇠놀음이 시작되면 이를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곧바로 신명을 부르게 마련이다.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강렬하게 두들기는 활기찬 쇠소리의 강약은 바로 집단을 호령하는 장수의 위엄이다. 그런가 하면 다정한 꽹과리의 가락이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풍물단의 전 구성원은 물론, 몰려든 구경꾼들도 저절로 어깨춤을 추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오랜 관록의 상쇠요, 신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인천태생이다. 소년 지운하는 고향땅 인천에서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치는 풍물굿을 자주 보며 자라났다. 그는 인천소재 숭의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풍물굿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당시 학교에서는 박산옥(朴山玉) 명인이나 최성구 명인을 초청하여 지도를 받았으며,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사물놀이로 유명한 김덕수 명인의 아버지 김문학 문하에서도 수학을 하였고 그 이후로는 사당패의 유명한 스승들에게 풍물을 단계별로 익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가 살던 도화동 마을에는 <도화동 풍물단>이 있었는데, 그의 부친 지동옥 명인이 상쇠를 잡고 있었다. 1959년 당시 도화동 풍물단에서는 위 아랫마을의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경기도 대표팀으로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팀은 단체 상위 입상을 하였고, 12발 상모를 너무도 잘 돌린 지운하 소년은 특별상(장관상)을 수상했다.

 

이 사실로 인해 그는 일약 인천 풍물굿의 대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3년 뒤, <도화동풍물단>은 인천의 대성목재로 소속이 되었고, 419516을 지나면서 다시 재개된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는 쾌거를 이룬다. 평소의 연습량이 많고 충실했던 탓에 전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역할을 잘 해 주면서 전체적인 호흡을 맞춘 결과였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그뒤, 그는 남사당에 입문하면서 익혀온 선생의 가락을 지켜나가는 한편, 땅재주나 접시돌리기, 인형극 등 남사당의 각종 예능을 자연스럽게 두루 익히게 되면서 남사당의 정상급 명인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 역시 고희를 맞았으니 60년 세월을 남사당과 함께, 풍물과 함께 그리고 상쇠잡이로 예인의 길을 올곧게 걸어 온 것이다.


내가 지운하 명인과 가깝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20여 년 전, 어느 여름 중국 연변대학에서의 만남이었다. <한국전통음악학회>와 중국의 <연변예술대학>이 해마다 공동으로 개최하는 학술 및 실연교류회장에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던 지운하 명인이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게 활동하는 그였기에 그와의 만남은 더더욱 반가웠다. 당시 지운하는 동료들과 함께 연변지방과 할빈, 흑룡강성 등지에 있는 학교나 단체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상대로 풍물가락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연변대학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 하얼빈에서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밤새 달려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우리말이 서투른 2세나 3세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우리말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모국어는 동포사회에서 통하지 않게 될 것이 분명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이 그 넓은 중국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국어와 함께 우리의 노래는 필수이고, 장고, 꽹과리 가락이 절대적인 힘이 된다는 사실을 나와 지운하는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을 심고, 자긍심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목적 아래 해외에서의 봉사 활동이 얼마나 의미 있는 작업이고, 더욱이 이러한 활동이 댓가를 바라고 하는 활동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더욱 더 친해 질 수 있었고, 그 이후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사당이란 조직에서 생활해 온 예인이어서 남 다른 그만의 생활철학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바로 선생을 존경하고 후배들을 보살피는 인간적 유대가 돈독한 사람이다. 선생의 말씀은 곧 생명으로 알고 따랐다고 하면서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고 간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기본질서가 무너지면 그 조직은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공동생활의 기본 질서를 남사당에서 착실하게 배운 그가 이제 남은 인생을 고향땅 인천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며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자신을 위하고 고향 주민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지운하의 상쇠놀음을 비롯하여 소고놀이와 열두발 상모를 더 많은 후진들이 배우고 익히기를 기대한다.

 

최근 내놓은 택 지운하의 유랑 인생 60은 남사당을 위해 평생을 다한 한 예인의 실감나는 이야기들이 잔잔한 감동과 함께 재미를 더해 주기도 한다. 부디 고향땅 인천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예인의 생활이 남을 위하고 지역을 위하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되기를 기대하며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