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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휘모리잡가는 해학(諧謔)이 넘쳐나는 노래

[국악속풀이 31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울, 경기지방에서 불러온 휘모리잡가 중 비단타령 이야기를 하였다. 이 노래는 앞에서 소개한 판소리 흥부가에 나오는 비단타령과는 가사도, 창법도, 장단도, 음계도 전혀 다르다는 점, 그 시작은 청색 홍색 오화잡색, 당물당천 거래시에 동경천이며 남경천, 동양천이며 서양천이라.”로 시작하여 <중략> 마지막 부분은 기갈이 자심하고 초기가 막심하야 기다리고 바라던귀, 야반삼경 조요한데 문틈으로 넘나든 귀, 일락서산 저문 날에 지체 말고 가거스라.”로 맺고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서울의 잡가는 앉아서 부르기 때문에 이를 좌창(坐唱)이라고도 부르는데, 긴잡가는 느린 6박의 도드리 장단, 휘모리잡가는 빠른 4박의 타령장단이란 점, 잡가라고 하는 명칭은 정가(正歌)에 대해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를 낮추어 부르는 명칭이란 점, 1920년대의 잡가집에는 정가와 민속가의 대부분이 한 책속에 잡거(雜居)하고 있기에 <여러 노래의 모음집>이란 뜻으로 잡가(雜歌)로 불러 왔다는 점, 휘모리잡가는 해학적인 긴 사설을 휘몰아치듯 빠른 장단으로 부른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서울, 경기지방에서 불러온 휘모리 잡가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휘모리잡가의 사설은 재담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해학적이며 볶는타령 장단으로 빠르게 몰아간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래는 자연히 뒷 순서에 부르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이 풍류방에 모여 점잖게 가곡을 부른 것에 비해, 사계축의 가객들은 하루의 힘든 일을 끝내고 공청(公廳)에 모여서는 먼저 가사와 사설지름시조창과 같은 느린 템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그 다음엔 긴잡가나 산타령과 같은 점차 흥겹고 경쾌한 소리로 진행시켜 나가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무렵에는 대개 이 휘모리잡가를 불렀다는 것이다. 공청이란 파를 키우는 움막같은 곳으로 대개 소리꾼들이 모여서 목청을 높여 소리를 하던 곳이다.


   

잡가(雜歌)가 생겨나기 시작한 때는 대략 1800년대 말엽에서 1900년대 초엽, 상업의 발달과 함께 유행했던 소리로 생각된다. 1900년대 초, 잡가집이 쏟아져 나온 점이나, 그 잡가집 속에 <바위타령>이니 맹꽁이타령, 곰보타령 등의 휘모리잡가의 대표적인 노래들이 포함되어 있는 점을 보면 당시 휘모리잡가도 많은 대중들이 즐겨 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긴잡가나 휘모리잡가 등의 제목이나 사설을 보면 12가사나 판소리, 민요 등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노래는 일반 대중들이 즐겨했지만, 주로 삼패(지금의 용산구 청파동과 만리동 일대에서 소리를 전업으로 삼은 무리)나 사계축(서울역 뒤쪽 만리동과 청파동 일대에서 잡가류의 노래를 부르던 소리꾼들)의 전문 소리꾼들이 불렀던 노래이다. 다시 말해 과거 전통사회에서 노래를 직업으로 삼던 사람들은 기생을 비롯하여, 사당패나, 전문 소리꾼들이었는데, 이들은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계보를 형성하며 배워 왔던 것이다.

 

휘몰이잡가는 빠른 장단으로 불러서 사설의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주의를 기울이면 훨씬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어떤 것은 옛 장형시조 가운데서 우습고 해학(諧謔)이 담긴 내용과 맥을 함께 하는 것도 있으며 원래의 사설에 군말이 많이 들어가고, 또 창법을 달리 하기 때문에 시조의 변형임을 몰랐으나 시조 창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있어서 형식으로 볼 때는 엮음시조 또는 사설시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잡가는 서울 문안과 근교, 서울 중에서도 만리재, 청파동, 애오개 등의 사계(四栔)축에서 서민 출신 가객들이 잡가를 부르기 시작하며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계축의 소리꾼 가운데에서도 추교신(秋敎信), 조기준(曺基俊), 박춘경(朴春景)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하는데, 이들은 창법이 속되지 않고 노랫말이 정확하여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특히 잡가의 명창, 박춘경은 농부출신으로 조기준에게서 배워 시조, 수잡가, 긴잡가, 휘모리잡가를 잘 불렀다고 하며 잡가의 확산에 공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긴잡가에서 가장 널리 불리고 있는 <유산가(遊山歌>를 지어 부르고 가르친 명창으로도 유명하다.


 

잡가를 잘 부르던 명창들의 태어나고 죽은 때와 활동시기는 뚜렷치 않으나 대략 1800년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휘모리잡가의 한 곡인 <육칠월 흐린날>이 크게 유행했다는 점이나 1881년생인 박춘재가 어렸을 때부터 휘모리잡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말한 점, 그리고 1907년 최초의 휘모리잡가 음반이 출시되었다는 점에서 그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경기민요와 잡가를 잘 불러 널리 알려진 이현익(李鉉翼) 또한 잡가의 창작자로 유명하다. 그가 창작한 휘모리잡가로는 <병정타령> <맹꽁이타령> <바위타령> <비단타령> <순검타령>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 순검타령은 전승이 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중 <비단타령>은 다소 생소하고 어려운 비단의 이름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어서 다른 휘모리잡가에 견주어 부르는 사람이 적었다.

 

<비단타령>은 마치 경을 읽는 듯한 독경(讀經)방식으로 노래하는데, 곡의 길이가 짧지 않고 사설 내용이 어려운 편이며 장단이 2분박과 3분박으로 부분 부분 변화하는 등 어려운 특징이 있는 노래이다. 특히 이 <비단타령>은 다른 휘모리잡가에 비해 부르는 이가 매우 적고, 전승 또한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못하고 있다.

 

다행히도, 서울이나 경기, 인천 지역에서는 <휘모리잡가>를 지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현재까지 체계적으로 전승해 오고 있으나 다른 장르처럼 활발치 못하다. 이의 적극적인 육성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