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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화냥년이 된 의순공주의 족두리 산소

의정부 천보산 기슭의 족두리 산소에 가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8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기슭에는 족두리 산소라고 불리는 무덤이 있습니다. 효종 때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당하다 28살에 병으로 쓸쓸하게 죽은 의순공주의 무덤입니다. 얼마 전에 의정부 교도소에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의순공주 무덤에 들러보았습니다. 지금부터 비운의 의순공주 삶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 그전에 혹시 공녀화냥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말씀드려야겠네요.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참패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처녀들을 상납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끌려가는 여자들을 공녀(貢女)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이렇게 공녀로 끌려갔거나 전쟁 직후 포로로 끌려간 여인들 중에 용케 조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고향에 돌아온 여인이라고 하여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고리타분하게 여자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요구하던 유교국가 아닙니까? 그래서 환향녀를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양반댁에서는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지요. 이 환향녀가 음운변화를 일으키면서 화냥년이 된 것인데, 오늘날에도 화냥년이라고 하면 색기가 많고 품행이 올바르지 못한 여자를 뜻하는 말로 쓰이지요.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순치제(청나라의 제3대 황제) 때 섭정왕 도르곤은 1650(효종 1) 3월무렵 조선의 공주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합니다. 당시 청나라 최고의 실권자였던 도르곤이 요청하는 것인데, 힘없는 조선이 어찌 이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공주를 도르곤에게 보낼 마음이 전혀 없던 효종은 끙끙 앓습니다.

 

이때 종친인 금림군 이개윤이 자기 딸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효종으로서는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효종은 이개윤의 딸을 자기 양녀로 하고 의순공주라 합니다. 대의(大義)에 순종하였다고 하여 의순(義順)공주이겠지요. 그리고 42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출발할 때 서대문 밖 모화관까지 나와 의순공주를 떠나보냅니다.

 

그래도 의순공주는 청나라 실권자 도르곤의 아내가 되었으니, 이렇게 공녀로 끌려간 조선의 여인들 중에는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해 말 도르곤이 사냥 중에 돌연 사망하여 의순공주의 왕비로서의 삶은 불과 7개월로 끝납니다. 그리고 도르곤의 조카인 정친왕 박락과 재혼합니다.

 

어떤 과정으로 박락과 재혼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도르곤이 죽자 도르곤은 황제 자리를 엿보았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 된 것으로 보아 의순공주는 박락에게 넘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에는 역적으로 몰리면 재산은 몰수되고 가족들도 사형당하거나 노비로 팔려가지 않습니까? 의순공주도 그렇게 넘겨졌을 것입니다.

 

그나마 의순공주가 박락과 백년해로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박락마저 1652년에 죽습니다. 이제 의순공주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후 청나라에서 의순공주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아무래도 비참한 삶을 이어갔을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을 아버지 이개윤이 듣습니다. 이개윤은 1656년 청나라 사신단으로 북경으로 가, 청황제에게 딸을 돌려보내줄 것을 간청합니다. 청황제도 이 불행한 부녀를 딱하게 보았던 것일까요? 다행히 이개윤은 딸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서두에서 제가 화냥년 얘기를 하였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돌아온 부녀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개윤이 청나라가 보내온 많은 비단에 눈이 어두워 자청해서 딸을 청나라로 보냈다느니, 의순공주가 도르곤에게 소박맞고 그 부하에게 재가를 했다느니 하면서 쑥덕쑥덕합니다. 결국 의순공주는 돌아온 조선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다가 1662년 한창 화려한 삶을 피어 올려야 할 27살의 나이에 시름시름 앓다가 한 많은 세상을 뜹니다. 그리고 제가 이 날 찾아간 곳에 묻힌 것이지요.

 

의순공주를 바라봅니다. 무덤을 덮었던 풀들은 말라죽고, 봉분은 여기 저기 패어져 있습니다. 편히 눈을 감지 못했던 여인인데, 무덤이나마 잘 관리해주면 좋을 것을... 아직도 화냥년이라며 무덤을 돌봐주지 않는 것인가요? 그런데 의순공주 무덤을 왜 족두리 산소라고 하는 것일까요?

 

무덤 앞의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청나라로 끌려가던 의순공주는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에게 강제 결혼을 당하여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강물에 몸을 던졌답니다. 그래서 수행하던 노복들이 의순공주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건져와 이곳 금오동 선영에 장사를 지냈기에 족두리 산소라고 부른다는군요.

 

안내문에는 의순공주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고국땅을 뒤로 하며 자신의 족두리를 벗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나중에 받아본 공주의 어머니가 공주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여 족두리를 장사 지낸 것이라나요? 그럼 저 무덤 속에는 의순공주의 유골이 아니라 족두리만 있다는 얘기인가요?

 

글쎄요. 의순공주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지 말고 차라리 강물에 빠져죽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런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그것 참……. 저 무덤 속에 의순공주는 없고 족두리만 있다니, 의순공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안 되나요?

 

저는 잠시 눈을 감고 비운의 공주, 의순공주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저를 기다리고 있는 차로 돌아갑니다. 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의순공주를 바라봅니다. “공주님! 편협한 남자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공주님! 불쑥 찾아 온 후인(後人)이 잠시 공주님 앞을 서성거리다 갑니다. 이젠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