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역사와 민족

이즈반도 아라리항은 고대 가야와 긴밀한 관계의 땅

[우리문화신문= 시즈오카 아라리 이윤옥 기자] 아라리항(安良里港)으로 가는 길은 마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 굽이굽이 굽은 산길을 달려야했다. 이즈반도(伊豆半島)의 시모다(下田)에서 아라리항까지는 승용차로 1시간 남짓한 거리였지만 2차선의 좁은 길인데다가 산길이라 속력을 내지 못했다.


동행한 지인 이토 노리코(伊東典子, 62)씨는 아라리항과 고대한국이 관련된 곳이라고 하자 한국의 아리랑 노래와 비슷한 땅이름이라고 하면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리코 씨는 과거 한국어를 배운적이 있는데 그때 아리랑 노래를 배웠다며 제법 가사를 외우고 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이즈에서 30년을 살고 있는 노리코 씨는 아라리항구 쪽에는 여러번 와봤지만 이곳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날 안내는 아라리항 가까이에 사는 야마모토 구미코(山本 久美子, 68)씨가 해 주기로했다. 하필이면 날씨가 궂어 약간 굵은 빗줄기 속을 달려 구미코 씨와의 약속장소인 아라리항이 건너다 보이는 니시이즈쵸 중앙공민관(西伊豆町 中央公民館)에 도착한 시간은 816일 오전 11시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구미코 씨는 이곳 공민관 2층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로 활동하는 사람으로 말하자면 우리네 문화해설사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동네의 터줏대감 같은 여성으로 만나보니 해박한데다가 해외여행도 많이 하여 나라안팎 사정에 두루 밝았다. 올 가을 10월에도 모로코 여행을 기획하고 있었다. 다만 한국에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면서 명함을 건네는 나에게 매우 미안하다고 했다. 기자가 만나본 상당수의 사람들은 한국을 가본적이 있다고 말을 건네왔지만 한편으로는 구미코 씨처럼 한국에 가본적이 없다는 사람도 많았다.

 

구미코 씨와 노리코 씨 그리고 기자는 곧바로 공민관에 차를 세우고 공민관 바로 옆에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아라리항으로 걸어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멀리 항구가 보였고 고대한국과 관련이 있는 아라리항에는 정박한 배 몇척 만이 이곳이 항구였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 1868)부터 쇼와시대(昭和時代, 1926~1989) 까지 오징어잡이로 유명한 곳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매우 번창한 항구였으나 지금은 오징어잡이가 쇠퇴하여 항구 기능을 잃은 지 오래라고 했다. 대신 이 일대는 유명한 낚시터로 변모하여 낚시꾼들에게는 꾀 알려진 곳이었다.

 

1968, 아라리항구를 찾은 일본속의 조선 문화를 집필한 김달수 씨는 이  책 <7> 32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시즈오카현의 이른바 김희로사건(金嬉老事件, 재일동포 2세인 김희로 씨는 1968220일 폭력단 관계자 2명을 사살한 뒤 그 다음날부터 나흘간 시즈오카의 후지미야 여관의 손님 등 12명을 인질로 잡고 신문과 TV 등을 통해 민족차별 문제를 호소했던 사람)의 특별변호인으로 있을 때 이곳 아라리항 근처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아라리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하여 주인에게 물으니 아라리는 조선말이라고 했다

 

김달수 씨는 이어 아라리(安良里)는 고대 한국의 가라(伽羅), 가야(伽耶)의 한 나라였던 아라(安羅, 다른말로 안나(安那))를 말하며 이는 가라(伽羅), 가라(), 가라(加良), 가라(韓良)라고 쓰기도 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아라리항 입구에 있는 우라모리신사(浦守神社)에서는 모로코시신(もろこし을 모시는 데 이 신은 도쿄에서 가까운 가나가와현 오이소(大磯)지역에 집단으로 살던 고구려인들이 모시던 신이다.고 했다.

 

아라리항의 공민관에서 문화해설사를 하고 있다는 구미코 씨도, 시모다에서 동행한 노리코 씨도 기자의 설명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 다만 한국어를 배웠던 노리코 씨는 이곳에 올때마다 아리랑 노래가 생각나서 한국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리랑 노래와 가야(가라, 아라)와의 연관은 노리코 씨의 상상에 가까운 일일 것만 같았다.


    

 

유감스러웠던 것은 작가 김달수 씨가 말한 아라리항 입구의 우라모리신사(浦守神社) 까지는 직접 가보지 못했던 점이다. 안내를 맡은 구미코 씨는 기자가 우라모리신사까지 가고자하는 줄은 몰랐다면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항구까지는 작은 통통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에 이 신사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안전을 빌곤 했지만 지금은 거의 찾는 이가 없는 신사라고 말했다.

 

멀리 등대가 보이고 고기잡이 배들의 안전을 지켜주던 고대 한국관련 신사를 바라다 보다가 발걸음을 공민관으로 돌렸다. 공민관 2층에는 제법 큰 도서관이 있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통성명을 하고 나니 담당자는 아라리촌사(安良里村史), 1997아라리풍토기(安良里風土記), 1971라는 두 권의 책을 꺼내왔다. 아라리촌사(安良里村史)아라리풍토기(安良里風土記)를 답습한 것이라 크게 볼 내용은 없었다.

 

아라리풍토기(安良里風土記)에도 아라리 마을이 고대 한국관련이라는 말은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시즈오카현사(静岡県史)를 인용하여 이 지역에서 1915년 마제도끼(磨石斧)와 돌도끼(石斧), 토기, 그릇류 따위가 발굴되어 이곳에 원시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고만 되어 있다.


흥미롭다고해야할까, 어이없다고해야할까, 아라리(安良里) 이름에 대해 말하길 지금의 아라리(安良里)는 한자를 아라리(阿羅里)라고도 썼고 아라리(阿蘭里)라고도 썼다. 여기서 아라(阿羅)란 새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대에 황무지를 개척했다는 뜻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아라(阿羅)라는 말이 새로움()을 뜻한다는 말은 일본어 공부 40년을 한 기자로서 금시초문의 이야기다. 그런 궁색한 말 밖에 쓸 수 없었던 것은 아라리풍토기(安良里風土記), 1971를 쓴 사람들이 고대 한국에 있었던 아라(安羅, 安那, 伽羅, , 加良, 韓良)라는 나라를 알지 못했던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명치정부의 고대한국 흔적 지우기 때에 그 기록 자체가 폐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 한 예로 가나가와현 오이소(大磯)에 있던 고려사(高麗寺)와 고려신사(高麗神社)를 들 수 있다. 천여 년 내려오던 절과 신사는 명치정부 때 신불분리(神仏分離) 정책에 의해 고려사는 간판을 내려야했고 고려신사는 고래신사(高來神社)로 이름을 바꾸는 등 대대적인 고대한국 지우기가 단행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지역 문화해설사인 구미코 씨, 노리코 씨와 함께 점심을 들면서 기자는 아라리항을 비롯한 고대한국의 역사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 정말 고대한국과 이곳 아라리항이 그런 관련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이런 시골 촌동네가 고대한국과 교류가 있었다니 흥미롭네요. 자랑스럽기도하구요.

 

정말 자랑스러운 것일까? 우동 국수발을 씹으며 기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미국을 비롯한 북유럽 등 서양 곳곳과 심지어는 아프리카 대륙까지 섭렵한 문화해설사 구미코 씨는 그러나 이웃나라인 중국을 비롯한 한국에 대해서는 역사는 고사하고 남들 다가는 흔해빠진 투어 관광한번 안한 사람이다. 바로 명치정부 때 서양을 따라 잡자.는 슬로건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먼 곳에서 온 한국기자를 위해 아라리항 곳곳을 안내해준 구미코 씨와 시모다에서 며칠간 숙박과 차량을 제공해준 노리코 씨에게는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즈반도의 골짜기 아라리항까지 차량을 제공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언감생심 발걸음을 하기 어려운 노릇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