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리문화편지

1926년 오늘은 임시정부 노백린 참모총장이 순국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73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26년 오늘(122)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낸 노백린(盧伯麟) 장군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 단칸방에서 52살로 순국한 날입니다. 장군은 21살에 대한제국 정부 관비생으로 뽑혀 일본에 가 일본 도쿄 경응의숙(慶應義塾)과 성성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한 뒤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하여 신식 군사학을 배우고 졸업했습니다. 그 뒤 귀국하여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을 지냈고 육군무관학교장을 비롯하여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을 지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맺었을 무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크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때 장군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 앞으로 가 위리 워리하고 개를 부르듯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가 그것을 알고 칼을 빼 들어 덤비자 장군도 칼을 빼들었지요. 이렇게 사태가 험악해지자 이토 히로부미가 황급하게 하세가와를 만류하여 겨우 결투까지 가지는 안았지만 연회는 파하고 말핬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장군은 무인으로서의 기백과 대쪽 같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장군은 국권이 일본에 빼앗기자 미국에 망명하여 한인비행사학교를 개교하고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항일비행사를 양성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때 항공술을 배운 졸업생들은 의기가 충천하여 도쿄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고 호언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장군이 독립전쟁을 위한 항일비행군단을 조직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 군역사상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후 장군은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참모총장, 국무총리 등을 지내며 평생을 무인(武人)으로서 항일무장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