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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지혜가 깃든 옷,' 스님의 가사는 어떻게 변천했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사(袈裟)란 스님이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法衣)를 말하며 종파에 따라 빛깔과 형식이 다르다. 불가(佛家)에서 가사를 받는다는 것은 법(,Dharma)을 받는 것과 같다고 한다. 5() 흥인대사는 6() 혜능대사에게 <금강경>을 강설하고 밤늦게 따로 불러 가사를 전하며 너를 6대조(六代祖)로 삼는다고 했다. 흥인대사가 물려준 가사는 곧 이었던 것이다.


    

 

지난 329일부터 41일까지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세택)에서 열린 ‘2018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서는 아주 특별한 전시가 있었다. “지혜가 깃든 옷, 가사전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이 그것이다.

 

가사(袈裟)라고 하면 스님의 옷쯤으로 알았던 나에게 이번 전시는 한국 가사의 기원과 변천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아주 뜻깊은 자리였다. 궁궐에서 입던 호화로운 왕실의상이나 몇 백 년 전 무덤에서 운좋게 썩지 않고 더러 나오는 일반인의 옷도 학문의 대상인데, 하물며 2천년 불교문화의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 가사에 대한 고찰이 별반 없었다는 데서 가사(袈裟) 전시회는 그저 대충 보고 지나갈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가사의 시작은 태자 신분이었던 석가세존이 출가할 당시 입고 있던 값진 옷을 사냥꾼의 옷처럼 발이 굵고 다 해진 가사야(kasaya)와 바꿔 입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바로 <방광대장엄경> 6의 출가품 제15석가세존이 교사야를 입고 있다가 사냥꾼이 입은 발이 굵고 다해진 가사야(kasaya)와 바꿔 입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출가수행자의 옷은 처음부터 새옷이 아닌 헌옷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분소의(糞掃衣)를 선택함으로써 일체의 욕망과 집착의 고리를 끊어버리려는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수행승의 옷은 화려한 색을 피하고 오정색(五正色) 곧 청, , , , 흑의 다섯 가지를 쓰되밝은 색을 누그러뜨려(壞色) 옷을 해 입도록 했다. 이를 괴색(壞色)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사분율> 권 제16에서는 새옷을 괴색하여 입으라. 비구로서 새옷를 받으면 반드시 푸른빛, 검은빛, 목란빛 등 세 가지를 염색하여 괴색할지니 만일 비구가 새옷을 받아 세 가지 빛을 합하여 물들이지 않고 입으면 파계죄에 속한다.고 했다.


    

 

괴색이란 색을 누그러뜨리고, 무너뜨린다는 뜻으로 기존의 시주받은 직물이 오방색이면 그 색상을 일부러 바래 보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석가모니 당시의 가사법은 북방불교권인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가사의 내의(안에 있는 옷)는 국속(國俗)에 따른 기본 복장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종교복식에서 가장 상징적인 옷만 원형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외의 옷은 국속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속옷은 한복스타일에 겉에 두르는 가사 부분만 부처님 당시 원형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선화사고려도경》(줄여서 고려도경이라 부름) 제18권에 “국사는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 삼중화상대사는 자황첩상복전가사(紫黃貼相福田袈裟), 아사리대덕은 괴색괘의에 오조(五條), 괴색의 포의(布衣)를 입었는데 첩상은 없다. 대체로 고려의 승복은 마납(磨衲)을 가장 존중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 고려도경과 고려사를 종합해보면 고려시대의 가사 색깔은 자황색, 형태는 납의(衲衣)를 선호하였으며 수가사(繡袈裟)는 산수(山水)를 수놓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중기 전까지 전승된 것으로 보이며 고승들을 그린 진영(眞影)에서 볼 수 있다.

 

조선중기의 가사는 국난에서 나라를 구한 승군(僧軍)의 승병장에게 하사한 것이 남아있으며 서산대사에게 내린 23조팔보문단가사, 사명대사에게 내린 25조보문단가사 등이 있다.


    

 

여기서 23, 25조와 같은 말은 비단 직조를 말하는 것으로 25조에서 7조까지 있으며 25조는 승랍 40년 이상, 21조는 30년 이상, 19조는 25년 이상, 15조는 20년 이상, 9조는 10년 이상, 7조는 10년 미만의 승려가 입을 수 있다.

 

사실 승려들의 가사에 대한 상식이 전무한 나는 이날 전시장에 실물인 25조의 가사를 직접 보고 그 섬세함에 놀랐다. 뿐만 아니라 21조부터 사미니들이 입는 만의까지 6종류의 직물을 직접 보면서 고승의 경지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전시장에는 성철스님의 누더기 두루마기와 가사가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유리관 너머에 걸려있는 성철스님의 누더기 두루마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백, 수천번은 족히 기웠을 법한 한 벌의 누더기 두루마기가 시사하는 것을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알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