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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진주성 싸움엔 논개, 평양성 싸움엔 계월향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5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평양 의열사(義烈祠)라 함은 세인이 다 아는 바와 가치 임진란에 평양 의기(義妓)로 유명한 계월향(桂月香)을 봉사(奉祀)하는 곳인데 을미년(乙未年)에 다시 진주 의기 옥개(玉介, 논개)를 겸사(兼祠, 함께 제사 지냄)하되 매년 음력으로 3월 15일과 9월 15일에는 평양 기생들이 합동하야 제사를 행하는 관례(慣例)가 유(有)한바(아래 줄임)...” 이는 1921년 04월 26일 치 동아일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1928년 일제가 불허한 출판물 목록에는 ‘계월향전’이 들어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계월향은 논개와 마찬가지로 소설이나 영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 가운데 1962년 박종화의 ‘논개와 계월향’이라는 소설이 발표됐고, 임권택 감독이 1977년에 만든 ‘임진왜란과 계월향’이라는 영화도 있었지요. 또 만해 한용운 선사가 “계월향에게” 라는 시까지 남겼는데 광복 이후까지 “북에는 계월향, 남에는 논개”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임진왜란의 2대 의기로 꼽혔습니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계월향이라는 평양기생은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던 소섭이란 왜장의 시중을 들게 되었지요. 그런데 계월향은 그 당시 장군이었던 김응서가 소섭을 죽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소섭을 죽인 뒤 김응서는 계월향을 데리고 평양성을 탈출했는데 계월향은 이미 소섭의 칼에 맞았고, 이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은 장수의 죽음을 알고 사기를 잃었다고 합니다. 뒷날 계월향이 살던 마을 사람들은 계월향의 충성심을 기려 마을 이름을 월향동이라 하였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