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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송강과 강아의 사랑 ‘영자미화(詠紫薇花)’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15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一園春色紫薇花(일원춘색자미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니

   纔看佳人勝玉釵(재간가인승옥채)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막향장안누상망)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滿街爭是戀芳華(만가쟁시연방화)  거리의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여 다투리

 

위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강아(江娥)’를 위해 지은 한시 ‘영자미화(詠紫薇花)’ 곧 “자미화를 노래함”이란 한시입니다. 자미화는 무려 100일 동안이나 핀다는 배롱나무, 곧 ‘목백일홍’이지요. 강아는 송강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남원의 어린 기생으로 본명은 자미(紫薇)였고, 원래 이름은 ‘진옥(眞玉)’이었으나 정철의 호인 송강의 ‘강(江)’자를 따라 ‘강아’라고 불렸습니다.

 

 

송강은 강아를 만나 머리를 얹어주고 하룻밤을 같이했으나, 사랑스러운 딸같이 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송강이 도승지로 임명받아 강아 곁을 떠나 한양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강아에게 석별의 시 “영자미화”를 지어준 것입니다. 송강은 아마도 이별 뒤에 뭇 사내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물까 두려워 이런 한시를 썼던가 봅니다. 그 뒤 강아는 정철을 향한 그리움으로 긴 세월을 보냈는데 송강이 평안도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송강을 만나러 길을 떠났지만 이미 복직된 송강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지요.

 

이후 머리를 깎고 출가해 여승이 되었는데 송강이 죽자 그의 무덤에 찾아가 시묘생활을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무덤 곁에 강아를 묻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송강의 무덤은 1665년 명당이라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로 이장하였지만 강아 무덤은 그대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는 ‘의기 강아의 묘(義妓 江娥 墓)’라는 글씨가 새겨 있지요. 이미 400년이 지난 그들 사랑의 향기가 지금도 아련히 전해오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