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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할 때, 그들은 비로소 역사가 된다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채색초상화 전시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전(展)>, 학고재갤러리, ~ 4. 3.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이 두 어절은, 오랜 시간 쉬이 조합되지 않았다. 싸우는 여자들은 많았으나, 역사가 된 이들은 드물었다. 누군가 의미있는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의 가치를 인정하고, 기록하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역사가 된다. 그래서 ‘싸우는 여자들’과 ‘역사가 되다’ 사이의 공백은 참으로 길었다.

 

마침내, 그 기나긴 공백을 메우는 전시가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다. 여성 주체의 삶을 드러내는 예술에 천착하며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은 이번 전시에서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대형 채색초상화와 설치작품 <붉은 방>을 선보인다. 작가의 완숙한 기량과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묵직한 감동을 자아낸다.

 

 

윤석남이 초상화에 눈을 뜨게 된 것은 2011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초상화의 비밀> 전시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이후부터였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그 자화상의 날카로운 눈매와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고, 작품 하나가 영혼을 뒤흔들 수 있음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때의 충격을 잊지 않은 윤석남은 2015년 말부터 민화 작가 김현자(경기무형문화재 제28호 이수자)에게 민화를 공부했다. 약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은 그녀의 작업실에 나가서 채색화 기법을 익혔고, 수없이 많은 자화상을 그려가며 초상화를 연구했다. 몇 차례의 개인전을 거치며 기량을 가다듬은 끝에, 마침내 한국 미술계에서 거의 그려진 적이 없었던 ‘채색 여성초상화’, 그것도 여성독립운동가의 채색초상화를 선보이게 됐다.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을 선정하기 위해 윤석남과 소설가 김이경은 몇 달간 고심하며 함께 인물을 선정했다. 김이경은 문헌과 기록을 바탕으로 14인의 독립운동을 소설 형식으로 각색했고, 윤석남은 이이경의 글을 바탕으로 14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이경의 글은 전시와 같은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됐다.

 

이 전시에 소개된 14인(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여성운동, 사회운동에 투신한 여성들이다. 사실 대부분의 이름이 대중에게는 퍽 낯설 법하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잊히고,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번 전시는 그들의 잊힌 이름과 얼굴을 되찾아주기 위해 마련됐다. 작가는 그들의 정신이 눈빛에 녹아있다고 생각하고 특히 눈을 집중해 그렸으며, 그들의 실행력을 상징하는 손 묘사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림의 배경이나 인물의 동작에서 그들의 직업이나 삶이 잘 녹아있는 것도 특징이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인물은 피 묻은 유골함을 들고 있는 박자혜의 초상이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 간호사로 일던 그녀는 3.1운동 당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해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을 시도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 북경으로 망명해 연경대 의예과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20년 봄 단재 신채호를 만나 혼인하고, 남편의 일을 도와 조선의열단의 폭파 거사를 돕는 등 투쟁에 힘을 보탰다. 남편이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뒤에는 둘째 아들마저 영양실조로 떠났고, 가난에 시달리며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43년 병으로 홀로 눈을 감았다.

 

“나는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중에서

 

그녀의 진혼곡이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듯하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다가 남편과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광복을 불과 2년 앞두고 눈을 감은 그녀의 삶은 신산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1990년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 그 훈장은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삶의 고초를 100만분의 1이라도 보상해줄 수 있을까.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남자현의 초상화에서도 추상같은 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녀는 경북 영양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제자 김영주와 혼인했는데, 남편은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다 1896년 전사했다. 그녀도 3.1운동 직후 아들과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군단체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무력투쟁에 앞장섰다.

 

 

그녀의 손가락은 혈서를 쓰며 스스로 자른 것이다.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 그녀는 왼손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곧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는 뜻의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보냈다. 독립운동 혈서를 쓰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결기는 범인(凡人)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추상같은 정신이었다. 그녀는 환갑이 넘은 62살 때 일본전권대사이자 관동사령관 무토를 암살하기 위해 가던 중 체포되어 고문과 단식투쟁 끝에 옥사하였다.

 

“내 가진 돈은 모두 249원 80전이다. 그 중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축하금으로 바치거라. 만일 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자손에게 똑같이 유언하여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해라. 남은 돈의 절반은 손자를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친정의 종손을 찾아 공부시키도록 해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 임종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

 

엄청난 담력과 기백으로 ‘여자 조자룡’으로 불렸던 인물도 있다. 바로 ‘양대 판서 집’으로 불리던 대갓집의 셋째 딸로 태어나, 독립운동가 남편과 시아버지를 찾아 홀로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합류한 정정화다. 이후 세 차례나 임시정부의 밀사로 국내를 오가며 자금을 조달했고, 3차 잠입 때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 용기에 탄복한 임정 요인 조완구는 ‘조자룡 같은 담력’을 가졌다며 '정정화의 온몸이 담덩어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1945년 마흔다섯의 나이로 해방을 맞을 때까지 임정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흔들리는 임정을 지켰다. 그러나 해방된 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전쟁 때 남편은 납북되고, 자신의 서울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부역죄로 구속되는 기막힌 일을 겪었다. 그리고 이산가족의 한을 풀지 못한 채 1991년 아흔한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고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묻힌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 회고록 《장강일기》 중에서

 

그토록 독립을 소원하며 독립운동에 전 인생을 걸었으나 끝내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타향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이 무수히 많다. 정정화는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돌아와,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고통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소원했던 독립된 조국은 과연 그녀의 노력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전시 말미의 설치작품 '붉은 방'에서는 종이 콜라주 850점과 거울 70점이 세 벽면을 채우고 있고, 바닥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을 그려 넣은 나무조각 50점이 서 있다. 이름없는 여성들의 나무 조각으로 채워진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세상을 뒤흔든 모든 여성독립운동가에 바치는 헌사다.

 

 

윤석남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14인을 시작으로 여성독립운동가 100인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다. 앞으로 불려질 이름이, 기억될 얼굴이 더 많다. 이들은 그 누구도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을 맞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던 시기에, 초인적인 신념과 의지를 갖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우리는, 그들이 조국을 기억한 만큼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과 얼굴. 한 개인을 인식하는 최소한의 단위. 그 기본적인 요소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던 이들. 이제, 그들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14명의 이름을 다시금 불러본다.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