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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8월 11일 순국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66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주검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벗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박 의사의 아버지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일부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 의사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는데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되었지요. 대한광복회 강령을 보면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나라 밖에서 무기를 사서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택상의 아버지) 등의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김좌진 장군은 박 의사를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박 의사는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1921년 8월 11일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