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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황희 정승, 임금 앞에서 주저 없이 ‘아니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77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황희(黃喜, 1363~1452)는 단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종 시대에 18년 동안 정승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희는 태종(太宗)이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지명할 때 반대해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으로 폐해지고 유배에 처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황희를 등용하려 할 때 많은 중신이 반대하자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라며 이를 일축했습니다.

 

그런 황희는 왕권이 강했던 시절 임금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을 거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이 중년 이후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자, 황희는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라며 반박할 정도였지요.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임금 앞이라도 임금 비위를 맞추려는 게 아니라 주저 없이 아니라고 말했지요. 그런데도 세종은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었던 황희를 늘 중용했습니다. 그렇게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세종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세종 편에 섰지요.

 

세종은 말년에 궁궐 안에 내불당을 만들자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학자들이 모두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때 세종은 황희에게 ‘집현전의 모든 선비가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어쩌면 좋겠소?’ 하자, 황희가 ‘신이 달래어 보겠습니다.’ 하고, 학사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집현전에 나올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황희는 위대한 임금 세종의 명재상이 될 수 있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