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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더위 먹어 죽은 백성, 얼음 캐던 사람들

김창협, 착빙행(鑿氷行 - 얼음 캐는 노래)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23]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季冬漢江氷始壯 (계동한강빙시장) 千人萬人出江上 (천인만인출강상)

丁丁斧斤亂相斲 (정정부근란상착) 隱隱下侵馮夷國 (은은하침풍이국)

斲出層氷似雪山 (착출층빙사설산) 積陰凜凜逼人寒 (적음늠늠핍인한)

朝朝背負入凌陰 (조조배부입능음) 夜夜椎鑿集江心 (야야추착집강심)

 

晝短夜長夜未休 (주단야장야미휴) 勞歌相應在中洲 (노가상응재중주)

短衣至骭足無屝 (단의지한족무비) 江上嚴風欲墮指 (강상엄풍욕타지)

高堂六月盛炎蒸 (고당육월성염증) 美人素手傳淸氷 (미인소수전청빙)

鸞刀擊碎四座徧 (난도격쇄사좌편) 空裏白日流素霰 공(리백일류소산)

滿堂歡樂不知署 (만당환락불지서) 誰言鑿氷此勞苦 (수언착빙차노고)

君不見道傍暍死民 (군불견도방갈사민) 多是江中鑿氷人 (다시강중착빙인)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얼자

많고 많은 사람들 강 위로 나와서는

쩡쩡 도끼질로 얼음 찍어내는데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가 닿겠네

깎아낸 두꺼운 얼음은 눈 덮인 산처럼 보이는데

차갑게 쌓인 음기 사람에게 닥쳐온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로 들어가고

밤마다 망치와 끌 챙겨서 강 복판에 모인다.

낮 짧고 밤은 길건만 밤에도 쉬지 못하고

주고받는 노동요 소리만 모래톱에 울린다.

정강이가 드러난 짧은 옷, 발에는 짚신도 없는데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은 떨어져 나갈 지경이다.

고대광실 오뉴월 푹푹 찌는 여름날에

여인의 섬섬옥수 맑은 얼음 내어오네

칼로 그 얼음 깨 자리에 두루 돌리니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집안 가득 앉아 더운 줄 모르고 즐기는 이들에게

얼음 캐는 이 괴로움을 그 누가 말해줄까

그대는 못 봤는가 길가에 더위 먹어 죽은 백성들을

많은 이가 바로 강에서 얼음 캐던 사람들이라네.

 

 

 

김창협(1651~1708)의 <착빙행(鑿氷行), 얼음 깨는 노래>라는 시입니다. 요즘이야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누구나 한여름에도 손쉽게 얼음을 구할 수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어디 그럴 수 있었나요. 한여름 얼음은 일부 소수의 특권층만 즐길 수 있었던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럼, 제빙기술이 없던 그 당시 한여름에 얼음은 어떻게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겨울에 얼어붙은 한강에서 얼음을 깨어 빙고(氷庫)에 잘 저장해두는 것입니다. 동빙고, 서빙고가 예전에 그런 역할을 하는 창고였지요.

 

빙고라고 하여 특별한 냉동시설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얼음을 볏집과 쌀겨 등으로 잘 포장하고 바깥 열기를 잘 차단하며 환기구로 공기가 잘 통하게 하여 한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존한 얼음이니 그 양이 많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한여름 얼음은 양반들이 다 즐기기에도 턱없이 모자라, 왕실과 소수의 특권양반층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면 임금은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특별히 선심을 쓴다며 얼음을 하사하곤 했지요.

 

그런데 한여름에 얼음을 즐기는 양반들이 한겨울에 몸소 얼음을 캐러 한강까지 나갈 리는 만무하겠지요? 그 일은 상놈들이 합니다. 한겨울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한강에 나가 얼음을 캐려면 얼마나 고생일까요? 시에 보니 그것도 한밤중에 강으로 나간다고 하네요. 방한복이나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시에서는 정강이가 드러난 짧은 옷, 발에는 짚신도 없는데(短衣至骭足無屝),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은 떨어져 나갈 지경(江上嚴風欲墮指)이라고 합니다. 손가락은 떨어져 나갈 지경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도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썩어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얼음을 캐어도, 한여름에 이들에게는 얼음 한 조각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고생하여 캔 얼음을 즐기는 소수의 특권층, 그들은 자신들이 즐기는 이 얼음을 누가 얼마나 고생하며 캐어온 것인지 알기나 할까? 그래서 시에서는 집안 가득 앉아 더운 줄 모르고 즐기는 이들에게(滿堂歡樂不知署) 얼음 캐는 이 괴로움을 그 누가 말해주겠냐고(誰言鑿氷此勞苦) 합니다. 이들은 얼음을 즐길 줄만 알지, 그들의 괴로움은 생각지도 않을 거라는 얘기지요. 이것만 하여도 소수의 양반을 위해 얼음을 캐는 사람들의 고생에 마음이 아릿한데, 마지막에서 시인은 더욱 결정타를 날립니다.

 

길가에 더위 먹어 죽은 백성들(道傍暍死民)이 바로 강에서 얼음 캐던 사람들(多是江中鑿氷人)이라니요! 그런데 아무리 덥다고 하더라도 그냥 더위 먹어 길가에 쓰러져 죽는 사람은 없겠지요. 아마 겨울에 양반들을 위해 고생하며 얼음을 깨던 백성들은 여름에도 더위도 피하지 못하고 땡볕에 양반들을 위해 일하다가 더위 먹어 길가에 쓰러져 죽은 것이 아닐까요? 아! 조선의 불쌍한 백성들이여!

 

이 시를 쓴 김창협은 그래도 이런 것도 모르는 채 얼음을 즐기는 양반들과는 달리 이런 백성들의 고생에 마음 아파하고 이를 시로 썼군요. 김창협은 양반 중에도 명문가인 안동 김씨, 그중에도 당시 떵떵거리던 장동 김씨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북악산 아래 장의동에 살았기에 장동 김씨라고도 불렀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유명한 시를 쓴 김상헌이 있지요? 김상헌의 증손자가 바로 김창협입니다. 김창협의 아버지 김수항은 영의정을 지냈고, 김창협을 비롯한 여섯 형제는 학문과 문예에 뛰어나 이들을 ‘昌’자 돌림을 따서 육창(六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명문가의 사람이었음에도 김창협은 거만하지 않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네요.

 

김창협이 이렇게 백성들에게 눈을 돌리게 된 데에는 자신 집안의 어려움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아버지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반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수항과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먹고 죽는데,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 기사년에 남인이 정국을 뒤집고 집권)이라고 하지요.

 

김창협은 아버지가 이렇게 죽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영평(지금의 포천)에 은거합니다. 그리고 갑술환국 때 아버지가 복권되고 자신에게도 계속 직책이 내려졌으나 이를 모두 거부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설악산 내설악에 가면 영시암이라는 암자가 있지요? 이는 마찬가지로 기사환국 때 내설악에 은거하며 다시는 인간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동생 김창흡이 지은 것입니다.

 

아무튼 명문거족의 김창협이 이렇게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가슴 아파하는 시를 썼다는 것에 그냥 시만 읽고 흘려버릴 수 없어, 제 나름대로 시 감상을 써보았습니다. 이젠 여름에 얼음과자를 먹으면서는 늘 김창협의 시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