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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임진왜란 때 이탈리아로 건너간 꼬레아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29]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전에 낙성대역 근처 헌책방 앞을 지나는데, 책방 앞에 헌책을 쌓아놓고 한 권에 1,000원씩 팔더군요. 책을 좋아하는 제가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그래서 쌓아놓은 책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여러 권의 책을 샀습니다. 그중에 오세영씨가 쓴 3권짜리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있습니다. 1993년에 나온 소설이니 30년 전의 소설책이네요. 저는 전에 베니스를 여행한 뒤 여행기를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이 소설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사볼 생각까지는 하지 않다가, 이번에 헌책 더미에서 이 소설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샀지요. 더구나 3권 합쳐 3,000원이면 공짜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작가는 세 가지 별개의 역사 사실을 하나로 묶어 소설책을 냈습니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에 이탈리아로 건너간 소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 특히 정유재란 때 – 수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어른들만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도 많이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노예로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 그들은 끌려간 곳에서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으며, 고국을 그리다 죽어갔을까요? 우리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를 거시적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시적으로 그때 백성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임진왜란이라는 역사는 결코 눈물 없이는 들여다볼 수 없는 역사입니다.

 

이렇게 팔려 간 노예들 가운데, 1598년에 프란치스코회 카를레티 수사가 사들인 5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카를레티 수사는 돌아가는 길에 그 가운데 4명의 아이는 인도에서 풀어주고, 나머지 한 아이만 피렌체까지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아이가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했고, 조선인이라 꼬레아라는 성을 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카를레티 수사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수도회에 입회시켜 신학공부를 하도록 했고, 이 소년이 자라 카톨릭 수사가 됩니다. 그렇게 하여 안토니오 꼬레아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인도에 내린 4명의 아이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이탈리아 남단의 알비 마을에 ‘꼬레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긴 것은 한국인 모습이 아니나, ‘꼬레아’라는 성을 쓴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까? 그건 이들의 조상이 코리아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조상도 역시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어떤 경로로 이탈리아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인과 혼인하여 알비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후손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알비 마을에 ‘꼬레아’ 집성촌이 생긴 것이지요. 처음 정착한 꼬레아 씨의 아들, 손자는 한국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겠지만, 대가 내려갈수록 한국인의 피는 계속 엷어져, 오늘날 꼬레아 씨들의 모습에선 한국인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힘듭니다.

 

카를레티 수사가 데려온 아이의 성을 ‘꼬레아’라고 했으니까, 알비 마을에 정착한 꼬레아 씨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일본에는 선교를 위해 카톨릭 수사들이 와있었고, 또 교역을 위하여 포루투칼,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을 왕래하고 있었으니, 유럽까지 끌려간 조선인이 안토니아 꼬레아 외에 다른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마지막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루벤스(1577~1640)의 그림입니다. 루벤스라면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유명한 화가 아닙니까? 어렸을 때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동화 《플란더스의 개》에도 루벤스의 그림이 나옵니다. 그 동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화가를 꿈꾸던 주인공 네로는 성당에서 네로의 친구 같은 개 파트라슈를 껴안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림을 보면서 얼어 죽지요. 그때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림이 루벤스의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루벤스가 1617년에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 한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한복을 입은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그 당시에 루벤스가 한복을 입은 남자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참으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한복과 비슷한 복장을 한 명나라 상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제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기록에 1600년에 명나라 상인 인포가 플랑드르에 와서 6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는 얘기가 있다는군요.

 

제가 보기에도 초상화 주인공이 입은 옷은 우리의 한복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색해 보이는데 – 그래서 이 옷은 전통 한복이 아니라 조선시대 무인이 입던 철릭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어쨌든 루벤스의 그림에 한국인으로 믿고 싶은 동양인이 등장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면 어떻게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오세영 작가는 루벤스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이 카를레티 수사가 이탈리아로 데려간 안토니오 꼬레아일 것이며, 알비 마을의 꼬레아 씨 조상도 바로 안토니오 꼬레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라는 소설을 쓴 것입니다.

 

그럼 개성상인은 왜? 오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안토니오 꼬레아를 개성상인의 아들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꼬레아가 베니스의 델 로치 상사에 들어가 개성상인의 실력을 발휘하여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 끝내는 델 로치 상사의 총지배인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공한 베니스 상인으로서 루벤스에게 의뢰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이 바로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것이고요.

 

오세영 작가는 단순히 안토니오 꼬레아의 입지전적인 인생 이야기만 그린 것이 아니고, 20세기 후반의 한국 종합 상사 직원 유명훈을 등장시켜 이들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펼칩니다. 개성상인의 피가 흐르는 유명훈이 상사맨으로서 이탈리아에 출장왔다가 안토니오 꼬레아를 알게 되는데,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가 하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지요.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오세영 작가의 처녀작이라는데, 소설은 200만 부 이상이나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습니다. 데뷔작이 200만 부 이상 팔렸다니 대단하네요. 소설을 잘 썼기도 하려니와, 당시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역사인물과 루벤스의 그림 <한복을 입은 남자>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관심도 판매에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오세영 작가는 원래 경희대 사학과를 나와 안토니오 꼬레아의 이야기에 강한 흥미를 느껴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취재하여 소설을 펴냈다고 합니다. 그런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소설을 냈으니, 저도 소설을 읽으면서 그대로 소설 속에 빨려 들어가 흥미진진하게 소설을 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아직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소설 속에서 안토니오 꼬레아가 개성상인의 후예로서 유럽의 30년 전쟁 때 구교(舊敎)에 베팅하여 성공하는 모습,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까지 가서 활약하는 모습 등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