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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어려운 이웃, 근대 일본을 만나다

쇼인 우리에게 비판의 대상, 하지만 그곳 시민은 따뜻해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11]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오늘날 해외여행이라고 하면 집집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때지만 80년대 초반만 해도 좀처럼 가기 어려운 특별한 일이었다. 방송국 기자생활을 하고 두 번의 해외 특파원으로 나라 밖를 많이 다닌 필자만 해도 첫 나라 밖 방문은 입사 후 6년이 지난 1983년이었다. 당시 유네스코 한국본부가 우리의 대학생 청년들이 나라 밖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일본역사문화탐방단을 만들었는데, 필자는 이 탐방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1983년 8월 17일에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배를 타고 들어가 첫날을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라는 도시에서 하루를 묵었었다.

 

그런데 지난 초여름 부산의 친구들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무선 동호인 연례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기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간다고 해서 필자도 동행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가 해외탐방 첫날을 보낸 곳인데 이번에 꼭 40년 만에 다시 가게 되는 것이다.

 

 

하기라는 곳은 일본이 우리 동남해안과 얼굴을 맞대고 있어서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울산과 부산지역에서 차출한 우리의 도자기 장인들을 배로 싣고 곧바로 도착한 곳이고, 이때 끌려간 분들이 가마를 연 것이 유명한 하기요(萩窯)이다. 또 하기에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킨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학당이 있는 곳인데 그런저런 유적을 찾고 역사를 공부한 기억이 아련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된다. 40년 전 일본을 거의 모를 때 다녀간 곳, 저녁 시간에 혼자 시간이 나서 거리를 다녀보니 옛 하기성의 흔적인 안쪽의 성문( 總北門)과 내성(內城)의 해자(堀內)가 있었다.

 

 

 

이 하기라는 곳은 사람들이 근대 일본을 일으킨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라고 일컫는다. 하기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 일대는 7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26대 성왕(일본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한다)의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집안인 오우치가(大內家)가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다스린 영지였으나 그 가신이었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반란을 일으켜 영주가 되어 ‘하기번(萩藩)’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도쿠카와(德川)의 반대편을 들다가 번의 영토가 축소돼 25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였고, 그 때문에 마침내 이곳 무사들이 중심이 돼 막부를 무너트리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 일본을 이끈 주요 인물들은 하기에 있는 작은 학당인 쇼카손쥬쿠(松下村塾)에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라는 한 젊은 이단아 무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도쿄 근처에 왔을 때 단신 군함에 몰래 올라갔다가 붙잡혀 수감 생활을 하던 이 젊은 사무라이는 일찍부터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서양문명을 이기려면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젊은 제자들에게 심어주었다.

 

단층 짜리 목조기와집인 이 학당은 생활공간과 강의실로 된 단출한 집으로, 여기에서 약 3년 동안 교육받은 100여 명의 젊은이들이 나라 밖으로 뛰어나가 선진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뒤 일본 전역에서 활약한다. (다만 이렇게 일어선 일본이 군사력을 앞세워 이웃나라를 침략하게 된 사상적 원동력이 이곳에서 나왔기에 요시다 쇼인은 우리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일본의 산업화는 1850년 무렵부터 1910년 사이에 대부분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곳 하기와 나가사키, 사가 등 일본 서부에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하기에는 제철유적, 용광로 유적, 조선소 터 등이 남아있어 이런 것들이 2015년 유네스코에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여기에는 앞에 나온 쇼카손쥬쿠 학당도 포함되어 있다. 시내를 다녀보니 이런 광고판, 안내판이 많이 눈에 띄었다.

 

 

 

 

마침 시내 길거리를 산책하다 보니 나지막한 집들이 잘 구획된 구역에 나란히 서 있다. 이 집들은 성주를 모시던 옛 사무라이들의 성 아랫마을이란다. 당시 무사들은 이렇게 살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많지 않은 흔적이다. 이 일대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기시가 우리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 때 이곳에 끌려온 우리 도공들이 가마를 만들고 뛰어난 도자기들을 만들었던 역사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도자기의 전통을 가장 잘 지킨다는 하기야키(萩燒)의 이 도자기들은 큐슈의 아리타야키(有田燒)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40년 만에 다시 찾은 하기라는 동네는, 그런 역사에 견줘서는 아주 조용하다. 마치 시골마을 같다. 일본의 근대화를 일으킨 이 동네가 이렇게 더 이상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은 조금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이 동네를 지나서 저 멀리 간 느낌이다. 마치 우리의 경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이곳이 도쿄나 오사카 같은 일본의 중심지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큐슈는 많이 가지만 이곳은 단순히 이곳만 보려고 오기에는 뭔가 아쉬워 그런 듯, 관광객들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진정 일본의 근대와 현대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곳이 매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깨끗하고 조용한 시가지처럼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마음씨가 가슴에 와닿는다. 주택가를 돌다 보니 동네에 이렇게 어린이들에게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도와주는 집들이 지정돼 운영되고 있었다. 동네에 붙은 공산당의 선전벽보가 웃음을 준다. 좋은 것은 다 하겠다는데 왜 공산당은 일본에서 인기가 없을까?

 

 

 

우리가 하룻밤을 묵은 곳 주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분은 평생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우리나라에 건너와 부산의 한일친선협회 사람들과 교류한다. 이곳과 마주보고 있는 울산의 대학교에는 많은 학습기자재 등을 기증했다. 또 이곳을 찾는 우리같은 사람들을 맞이해 숙소와 식사를 제공한다. 우리 일행도 숫자가 많았는데도 이웃 친구 부부와 함께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고 하룻밤을 재운 뒤에 아침까지 정성껏 차려주어 우리 모두를 감복하게 했다. 이것이 순수한 일본인들의 마음일 것이다.

 

하기라는 곳은 앞에 말한 요시다 쇼인이나 그 뒤의 메이지 유신의 인물들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인기가 없는 곳이지만 정작 거기에 사는 일본인들은 그런 정치적인 역사와는 상관없이 민간 차원에서 교류하고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날 너무나 정성껏 해 준 대접이 무엇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닌, 순수한 이웃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바다로 가로막혀 있지만 그 옛날 바다 건너에서 한 동네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되었다는 인식이 가슴 속으로 이어져 온 것 때문이 아닐까 멋대로 상상해 본다.

 

일본이란 이웃은 참으로 어려운 상대다. 정치와 언론은 툭하면 서로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사는 일반 시민들은. 우리도 그렇지만, 서로를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엄연한 사실의 증거를 이곳 하기에서 확인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기 시에 사는 오카 선생님과 부인, 우리를 안내해주신 그 친구분께 지면을 통해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한다. 혹 한국에 오면 차라도 한 잔 모셔야겠다.

 

 

하기(萩)라는 이름은 사철쑥을 뜻한다고 한다. 하기는 사철 푸르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