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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힘을 느낀다 가와카미 히로미의 《마나즈루》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류리수 옮김
맛있는 일본이야기 <70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마나즈루에 도대체 뭐가 있니?' 엄마는 애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것도 없지만 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역시 내 목소리였고 그대로 현관을 나왔다. 도쿄역까지 가는 전철은 굉장히 붐볐다.”

 

이는 소설 《마나즈루》의 주인공 케이의 말이다. 케이는 ‘아무것도 없는 곳’인 마나즈루를 향해 오늘도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마나즈루로 발걸음을 옮기는 날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마음이 심란한 때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거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외로울 때, 그리고 12년 전 실종된 남편의 흔적이 몹시도 그리울 때 그녀는 마나즈루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얼마 전, 아끼는 후배로부터 소설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후배는 가와카미 히로미 작품인 소설 《마나즈루》를 번역했다고 하면서 사인까지 곱게 해서 책을 보내왔다.  책 표지에 두른  띠지(출판사에서 홍보하기 위한 책 광고 문구 등이 기재됨)에는 “추리소설과 여행기, 우아한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꿈 같은 작품”이란 광고 문구가 쓰여있다. 아담한 크기의 소설책을 받아 든 나는 책장을 대충 넘겨본 뒤 책상 위 한쪽에 한동안 방치(?)했다.

 

사실 나는 요즘 소설을 읽을 여유가 없다. 소설은커녕 써야 할 책으로 언제나 시간이 모자란다.. 거기다가 예전에는 소설이고 시집이고 수필집이고 닥치는 대로 문학서적을 사서 읽었지만 나이 들어 가면서부터 ‘남의 글’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점도 한몫한다. 그런 판에 소설이라니, 더구나 장편소설이다. 하지만 책을 보내준 후배의 성의(?)를 생각해서 과제처럼 큰맘 먹고 책장을 폈다.

 

바닷가로 내려왔다. 바다는 별것 없었다. 파도가 밀려올 뿐이었다. 가운데쯤 있는 바위에 앉아서 먼바다를 바라봤다. 바람이 거세다. 물거품이 때때로 덮쳐서 옷을 적신다. 입춘은 벌써 지났는데도 추운 날이다. 갯강구가 바위 밑을 들락거린다. 처음부터 여기에 묵으러 올 생각은 없었다. 도쿄역에서 사람을 만날 용건이 있어서 간단한 식사를 마친 것이 저녁 7시였다. 중앙선을 타려고 했는데 어째선지 도카이도선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아타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래도 아직 중앙선이라면 도쿄행 전철은 다니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왠지 너무 불안해져서 꾹 참았지만, 결국엔 내려버렸다. 그렇게 내린 곳이 마나즈루였다.”

 

바닷가, 파도, 먼바다, 물거품, 아타미, 도쿄행 전철. 왠지 구미가 당기는 낱말이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겨울바다. 그 겨울바다의 쓸쓸함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자 갑자기 소설책을 읽고 싶어졌다.

 

 

마치 내가 주인공 케이가 된 듯 소설책은 술술 읽혔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했다. 어린 딸아이를 하나 둔 평범한 주부 케이는 어느 날 남편의 실종을 접하게 된다. 소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12년 동안의 남편 부재에 대한 ‘케이의 대응’ 이야기다. 주인공 케이가 드나들던 마나즈루항구는 실종된 남편의 일기장에 적혀있던 곳이다. 그러나 일기장에는 남편 레이가 마나즈루에 왜, 누구와 드나들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없다. 하지만 아내 케이는 그곳을 드나든다. 소설은 그게 전부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무슨 도(道)라도 깨친 듯,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책장을 덮고, 작업 중인 집필을 위해 컴퓨터를 켜자 D플랫폼에는 온갖 뉴스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소제목 하나가 눈에 번쩍 띄었다. ‘중년 여인, 남편의 외도를 알고 극단 선택’이란 제목이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싶었지만 이내 방금 책장을 덮은 《마나즈루》의 케이가 떠올랐다.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12년 동안 생사를 모르는 남편의 부재를 온몸으로 겪으며 어린 딸을 키워나가는 케이와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을 버린 여성이 왠지 비교되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살다 보면 배우자의 유고(有故)를 비롯하여 수많은 관계 속에서 각종 이별과 마주치게 된다. 소설이든 현실이든 그러한 유고를 만났을 때 그 상대방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을 듯하다. 울고불고 반미치광이가 되어 하던 일도 집어치우고 남편을 찾아다니다가 폐인이 되는 길과 《마나즈루》의 케이처럼 살아가는 길이 그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던 그것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몫이다.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마나즈루의 주인공 케이와 같은 상황과 맞닥트렸을 때 나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가 과제인 것이다.

 

예전에 일본소설이든 한국소설이든 소설을 탐닉하던 시절, 나는 곧잘 소설에서조차 ‘일본인과 한국인은 그 정서가 다르다’라며 독백처럼 중얼거리곤 했었다. 그 다른 정서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만난 낱말이 ‘거리(距離)’다. 나는 이 말에 무릎을 쳤다. 맞다. 거리다. 삶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남편 레이와 나와의 거리, 딸아이와 남편과의 거리, 친정어머니와 사위 레이의 거리, 새로 만난 세이지와 나와의 거리...그러니까 《마나즈루》는 '거리의 문학인' 셈이다.

 

내가 찾던 일본인의 정서에 힌트를 준 것은 문예평론가 미우라 마사시다. 그는 《마나즈루》의 평론 “나라는 유령- 거리(距離)를 건드리는 말”에서 이 소설을 한마디로 ‘거리(距離)의 문학’으로 정리했다. 탁월한 소견이다.

 

12년이나 실종된 남편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보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케이’는 화끈한 성격의 한국인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 모른다. 다만, 남편의 일기장에 남긴 ‘마나즈루’를 드나들며 슬픔과 기쁨, 고통과 인내, 쓸쓸함과 고독함 등의 희로애락을 삭혀가고 있는 주인공 케이는 가히 일본인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 점은 이 책을 번역한 류리수 작가도 간파한 내용이라 더욱 공감이 간다. 류 작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 연구자 간 사토코(菅聡子) 교수는 생전에 '책임져야 할 존재(아이)가 있는 여성이 10년이 넘도록 상처를 마주하지 않고 살아오다가, 죽음으로 향하는 듯한 절망으로부터 상처를 마주하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무너지고서야 비로소 그 끝에서 새로운 재생이 시작될 수 있었다'며 이 작품을 극찬했다.”라고 소개하면서 그 점에 끌려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소설을 번역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공력이 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단순한 공력만으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번에 《마나즈루》를 번역한 류리수 작가는 한국외대에서 한일비교문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5년부터 현재까지 문예지 〈문학과 현실〉에 이어 〈착각의 시학〉에 꾸준히 일본 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다. 번역서로 가와카미 히로미 《어느 멋진 하루》, 아리시마 다케오 〈한 송이 포도〉 〈클라라의 출가〉(각 《일본 명단편선》 3·5 수록)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이 있으며, 김구 《백범일지》를 일본어로 옮겼다. 류리수 작가는 번역을 마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마침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은 날이다. 아직도 나는 이를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살다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크고 작은 상실과 이별을 겪게 된다. 언젠가는 이를 마주하고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나즈루》가 부디 문학을 사랑하는 한국 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한 편의 영화가 역사를 재인식하게 하듯이, 한 편의 소설 역시 같음을 새삼 느껴본다. 길고 지루하면서도 노닥거리는 신물 난 3류 사랑이야기라는 편견 속에서 근래에 모든 소설 읽기를 접어버렸던 내가, 후배의 번역서 한 권을 읽고, 다시 소설의 힘을 느껴본다.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소설을 써야하는데 하는 생각만 하다가 올 한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내년 용띠해에는 후배 류리수 작가가 또 어떠한 작품으로 나를 자극하게 될지 한껏 기대해 본다.

 

《마나즈루》,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류리수 옮김,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