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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탐라의 하늘 아래 철학자가 된 시인

시집 《탐라의 하늘을 올려다보면》, 김영수, 문학공원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5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김영수 시인이 세 번째 시집 《탐라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을 내셨습니다. 형수님이 – 김 시인이 대학 선배이시기에, 형수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치매 증세가 심해지면서, 김 선배는 2021년 12월 형수님과 함께 아예 제주로 내려가, 탐라의 곳곳에 발길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탐라의 자연에서 아름다운 시어(詩語)를 건져 올리셨는데, 이번에 이를 모아 시집을 내셨네요.

 

 

시집 첫머리에 나오는 선배의 말을 들으니, 김 선배가 제주에 온 또 하나의 목적은 예술 속에 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 선배가 제주에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제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답니다. 김 선배는 관동별곡처럼 선인(先人)들이 제주 경관을 노래한 시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찾을 수가 없었답니다. 현대에 와서도 제주 관련 시들은 많았지만, 놀랍게도 제주의 자연을 노래한 시가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요? 김 선배님 말입니다. “내가 해보리라. 내가 노래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래서 김 선배는 그러한 시를 짓기 위해 우선 제주의 지질을 연구한 책을 사서 읽었으며, 제주의 설화를 집대성한 책들도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답니다. 왜? 김 선배는 제주의 자연을 보면서 경탄하고 또 경탄하였지만, 거기에는 인간이 감히 넘을 수 없는 무언가 경계가 있고, 넘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섣불리 묘사할 수 없음을 절절히 느끼셨다네요. 그래서 제주가 김 선배에게는 성질 급한 예술 지망생들의 교육장이며, 창작의 고통을 알게 하는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김 선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주의 자연에 들어가 앉으면 나도 모르게 자꾸 태초의 시간으로 들어가려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제주에는 모두를 시작점으로 돌리려는 영적 욕구가 있나 보다. 그 욕구에 응해 땅과 하늘만 있던 태초의 시간으로 날아올라 나를 보니 우주가 나였다. (중간 줄임) 우주의 기억들이 내 속에 담겨 있고 나는 그 기억들을 통해 우주와 교통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우주의 혼돈이었고 빛이었으며 사랑이었고 증오였으며 자비였고 냉혹함이었다.

 

와! 김 선배는 제주에서 단지 아름다운 시어만 낚은 것이 아니라, 우주 근본으로 들어가셨네요. 그래서 이번 시집을 해설하는 김순진 시인은 김 선배의 첫 시집이 자연 관조의 시집이었고, 두 번째 시집은 내면 관찰의 시집이라고 한다면, 이번 세 번째 시집은 완숙한 필객이 하느님 창조물을 관찰한 시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주와 함께하는 창조주의 사랑노래’라고 평합니다. 김 선배님이 제주에 가시더니, 시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셨군요.

 

시집에는 모두 119편의 시가 1부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가 있는 곳에서>, 2부 <나는 우주인가, 우주 속의 한 점인가>, 3부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로 나뉘어 실려 있습니다. 위에서 김 선배는 제주에는 모두를 시작점으로 돌리려는 영적 욕구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그래서인지 김 선배는 시집의 첫 편을 <새로운 시작>이라는 시로 시작합니다.

 

벗어나고 싶다 시간으로부터

하늘로부터도 땅으로부터도

 

나는 그저 나와 대화하고 싶다

내 속에 있는 몰랐던 나와

그것이 새로운 시작인 것을

버리고 다시 채우는 것임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끊었던 곡기를 우유로 잇는 것임을

 

김 선배는 제주의 자연을 접하다 보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 땅, 시간에서 벗어나 태초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으셨던 것이군요. 그리고 거기서 내 속에 있던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구요. 저 같은 범부(凡夫)는 그저 제주의 풍광에 감탄만 하다 마는데, 역시 시인은 깊은 심안(心眼)으로 제주를 바라보는군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제주 풍광 너머로 제주가 태어나기 위해 시뻘건 용암을 토해내고 바다는 펄펄 끓던 제주 태초의 시간을 보고, 다시 그 너머로 태초의 근원까지 보는군요.

 

이렇게 1부를 <새로운 시작>이라는 시로 시작한 김 선배는 2부 <나는 우주인가, 우주 속의 한 점인가>에서도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시로 시작합니다.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

그곳에 내가 있었구나

그래 내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혼돈도 질서도, 사랑도 증오도

바로 나로부터 비롯되었어

내가 있기에 내가 있었기에

우주가 생긴 것이었어

우주의 한 점이자 우주 자체

그것이 바로 나였어

 

으~음~ 거듭 말하지만, 김 선배는 단지 새로운 시적(詩的) 깨달음만 얻은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존재의 깨달음을 얻으셨네요. 그리고 시인의 경계를 넘어 철학자가 되셨네요. 그래서 김 선배는 막 피어나는 목련화 앞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봅니다. <좁은 문>이라는 시입니다.

 

막 피어나는 하얀 목련화 앞을 지나다

숨이 멎듯 나는 돌연 장승이 되었다

그곳엔

영원으로 통하는 좁은 문

순결이라는 문이 열려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좁은 문 안쪽

파장 뒤 또 다른 파장

은하 넘어 또 다른 은하

무한대 밖 무한대의 세계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는 지점

그곳엔 좁은 문이 잠깐 열려 있었다.

 

김 선배는 목련화라는 좁은 문을 통하여, 그것도 잠깐 열리는 좁은 문을 통하여 은하 넘어 또 다른 은하, 무한대 밖 무한대의 세계를 보셨네요.

 

한편 3부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에는 1부, 2부보다는 적은 시가 실렸습니다. 그것도 형수님에 대한 시가 많이 차지합니다. 아무래도 김 선배의 시 의식이 제주에 와서 우주, 존재의 근원으로까지 확대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사회라는 공간 속의 시는 줄어든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전 시집에는 사회에 관한 시가 많았지요. 3부의 시 중에서는 <‘만남’이란 시를 읽고 통곡을 한 여인>이란 시가 눈에 띕니다.

 

내 시집, 《있는 것과 없는 것》 속 한 편의 시, 만남

나도 잊어버린 그 시를 읽다 그만 울어 버린 여인

고향 떠나 바다 건너 제주 호텔에서 일하는 젊은이

무슨 슬픈 사연 있기에 ‘만남’에 공감하였을까

만날 때마다 그림자처럼 살펴주던 그 깊은 심령 속에

내가 깨운 잠자던 심연이 있었나 보다 아프디아픈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나면, 받아들이는 독자 각자의 몫입니다. 물론 아름답고 감동이 있는 시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지만, 그럼에도 각자 개별적으로 자기 경험의 세계와 시가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만남>이라는 시가 바로 그 여인의 아프디아픈 경험의 세계를 건드렸나 봅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이지요. 간혹 텔레비젼 음악프로를 보다 보면 가수가 노래하는데, 유독 한두 사람이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는 그 노래가 특별히 노래를 듣는 그 사람의 눈물샘을 건드린 것이지요. 제주 호텔에서 일하는 여인을 울게 한 시 <만남>도 여기에 올려봅니다.

 

만난다는 것 그것은 기쁨이다

만난다는 것 그것은 갈등이기도 하다

만난다는 것 그것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래도 만나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습을 보는

 

호텔 여인은 <만남>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눈물샘을 건드린 어느 아픈 만남이 떠올랐던 모양이네요. 저는 제 지인들에게 제가 쓴 글이나 사진을 번개글(이메일)로 보내면서, 시 한 편씩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에 대한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평소에 별로 답장하지 않던 지인이 시에 감동하여 답장을 보내오기도 합니다. 예전에 박노해 시인이 감옥 안에서 쓴 시를 지인들에게 보낸 적이 있는데, 한 지인이 그 시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답장하더라고요. 당시 그 지인은 잘나가던 사업의 부도로 곤경에 처해있었는데, 박 시인의 시가 곤경에 처한 그 지인의 감정선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동병상련을 느꼈던 것일까요?

 

위에서 김 선배가 제주로 내려간 이유 가운데 하나가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해서라고 하였지요? 그러니 이번 시집에는 그런 아내에 대한 시가 많이 나옵니다.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앞줄임)

봄이 되면 모두가 소생하나 보다

모두가 마냥 그리워지나 보다

다물었던 입들이 열리나 보다

여보! 우리도 꽃구경 가자

이제 그만 입도 열어야지 여보!

                              - <봄이 되면>

 

다물었던 만물의 입들이 열리는 봄에, 절로 경탄의 소리가 나는 봄에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내. 김 선배가 그런 아내에게 “여보! 우리도 꽃구경 가자. 이제 그만 입도 열어야지. 여보!” 할 때 선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시를 읽는 나도 마음이 미어터지는 것 같은데, 선배는?

 

메마른 대지에 비가 내린다

생명들이 놀랄까 보아 소리 없이 적시고 있다

붉은 꽃 노랑 꽃 다 놔두고

짓밟힌 낙엽 메마른 풀잎들만 주워 드는 내 처

그 시든 영혼도 적셔다오 흠뻑

놀라도 좋다 꽹과리 소리 나면 더욱 좋다

붉은 꽃 노랑 꽃 피어나면 금상첨화다

                           - <메마른 대지에 비가 내린다> 전문

 

이삿짐 풀다 발견한 낡은 옷 주머니 속 동전꾸러미

100원짜리 다섯 개 돌돌 휴지에 말려 있었다

10년 전 치매 초기 돈들을 감추던 내 마나님

침대 매트 밑, 옷장 깊은 곳, 자주 쓰지 않는 가방 속

휴지에 말아 돈을 숨기며 나에게 잔소리 듣던 시절

차라리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은 돈도 못 알아보고 그저 나만 쳐다보는 사람

                               - <오래된 옷 속 동전 꾸러미> 전문

 

어느 날 기적처럼 형수님의 맑은 정신이 돌아와 이 시를 읽으면서, “아니? 여보! 거짓말 말아요. 내가 언제 이랬단 말이예요?” 하면서, 선배님을 타박하는 날을 볼 수는 없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선배님은 형수님에게 타박을 당하면서도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아프냐고

외관상으로는 이상이 없었는데

답변 대신하는 기운 없는 웃음

오늘은 말에도 기운이 없다, 기운이

잘 지내느냐 묻는 동생 전화에

“아니” 대답했다 놀랍게도 내 마나님이

생각은 하는구나 판단은 하는구나

그 조금 남은 판단력 그 불꽃

미풍에도 흔들리는 촛불 같은 생명감

그 생명감마저 앗아가려 밀려드는 파도

(뒷줄임)

                                             - <마나님>

 

김 선배가 체념적인 시간을 보내는 어느 날, 형수님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순간 김 선배의 가슴 속엔 희망이 꿈틀합니다. 그러나 그 꿈틀거림도 잠시뿐. 김 선배는 그 생명감마저 앗아가려 밀려드는 파도가 원망스럽습니다.

 

이 밖에도 형수님을 생각하며 쓴 시가 더 있지만, 이 정도만 올립니다. 이 정도만 하여도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는 시인의 모습이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해설을 한 김순진 시인도 형수님에 대한 추억을 말합니다. 시인은 북한강에서 있었던 서울법대 모임에 갔다가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형수님이 치는 피아노 선율을 들었다는군요. 아! 유창한 영어에 강변에서 피아노를 치던 멋진 형수님이 어쩌다가...

 

제 마음이 이럴진대, 선배의 마음은 어떠할지 가늠이 안 됩니다. 그런데 형수님의 치매 기간이 길어지니까, 간혹 주위에서는 ‘이제 그만 시설에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묻기도 한답니다. 그럴 때마다 김선배는 ‘내 아내를 어떻게 남의 손에 맡기느냐’며 손을 훠이훠이 내젓고, 지금도 손수 형수님의 팔과 다리가 되어 함께 살고 계십니다.

 

선배님! 제주에서 이젠 시인을 넘어 철학자, 아니 영성가가 되신 선배님! 지금도 선배님은 형수님의 손을 잡고 탐라 하늘 아래를 걷고 계시겠지요? 앞으로도 탐라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탐라의 하늘 밑을 걸으며 펼치시는 시의 세계를 계속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