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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요즘 정치도 ‘당동벌이’가 그대로 들어맞아

《서애연구》 8권, 서애를 본받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5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서애연구》 8권이 나왔습니다. 《서애연구》는 서애학회에서 1년에 두 번 내는 학술지인데, 창간호를 받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8권째가 나왔네요.

 

저는 처음에 서애 류성룡 선생에 관해 연구하는 서애학회가 창립되면서 학술지도 낸다기에, 주로 역사학자가 참여하고 여기에 약간의 정치학자도 참여하는 학술지일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서애연구》를 8권까지 보면서 뜻밖에도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서애 선생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애 선생이라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지도자임이 먼저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리더십 연구자들도 서애 리더십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더군요.

 

 

8권까지에는 철학자 논문도 많습니다. 서애가 관직에 나가 있고 또 임진왜란 때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철주야를 했기에 유학에 대해 전문적으로 쓴 글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퇴계의 제자로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였기에 철학자들도 서애를 연구합니다. 이번 호에는 영남대 철학과 최재목 교수의 <서애 류성룡의 양명학 이해에서 보이는 중층성 해명>이란 논문이 실렸습니다. 서애가 양명학에 양면성을 보이기에 그 중층성(重層性)을 해명한다는 것인데, 최 교수가 인용하는 아래의 서애 글을 보면 서애가 얼마나 양명학에 열려있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양명문집에 대해 말한다. 내가 17세(1558년, 명종 13년)에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었는데, 마침 사은사 심통원이 연경에서 돌아왔으나, 대간이 점검하지 않았음을 탄핵하여 파직당하게 되었다. 압록강 가에 짐바리를 내버리고 갔는데, 짐 보따리에 이 문집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양명의 글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기뻐서 곧 아버님에게 말씀드리고, 글씨 잘 쓰는 아전을 시켜 베껴 내게 하여 상자 속에 간직한 지가 어언 35년이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7월에 왜구가 안동에 들어와 옛집과 원지정사를 불사르니, 집에 간직해 두었던 서적은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오직 이 몇 권만이 수풀 사이에 있어 온전하였다. 내가 그것을 다시 보니 불각(不覺) 중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슬펐다. 행장과 함께 가지고 제천에 도착하여 사실의 대강을 적어 자제로 하여금 잘 보존하여 다시는 유실되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조선의 숨 막히는 성리학 학풍 때문에 서애가 양명학에 양면성을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서애도 양명학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양명학에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국난을 극복함에 있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토지정책, 신분정책 등을 개선하는 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물론 전쟁이 끝나고 서애가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오명을 쓰고 파직당하면서 없던 걸로 되었지만요.

 

그리고 이번 8권에는 언론학자들이 쓴 논문도 있네요. 심재철, 김문환, 문안나, 이완수, 심재웅 교수가 공동연구한 <류성룡의 징비록에 나타난 성패지적 프레임과 책임 귀속의 공론화>라는 논문입니다. 이들 학자들은 서애가 언론 3사의 수장이었던 대사간과 대사헌, 대제학을 지낸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애가 쓴 징비록을 조선의 대표적인 언관(言官)의 종군기로 여기고 징비록을 철저하게 해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징비록을 기사(記事)의 집합체로 보고 서애가 임진왜란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일화적(Episodic) 프레임으로 기사를 쓰는지, 주제적(Thematic) 프레임으로 쓰는지 등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언론학에서도 서애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이번 8권에서 저에게 좀 더 눈에 뜨인 논문은 백권호 교수의 <류성룡에 대한 일부 부정적 실록 기록의 재해석에 관한 연구> 논문입니다. 저는 서애 선생을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사실 역사기록에는 서애에 대해 좋지 않게 쓴 부분도 있고, 특히 이순신 장군이 체포되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때 왜 서애 선생이 이순신 장군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었거든요. 그러나 우선 반대당파 인물들이 쓴 기록은 기록 그대로를 믿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에 대해 백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은)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타협이나 협조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한 사회였고, 급기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사화와 당쟁일 수밖에 없는 정치 역학적으로 매우 왜곡된 사회구조를 형성하였다. 조선 사회는 자기 확신적 편향성이 일방적으로 강해진 Win-Lose 게임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그 시대에 기록된 글과 문장을 액면 그대로 오늘날의 팩트처럼 받아들이는 데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서애는 상생, 타협이 가능한 사회를 추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화친도 필요하다는 태도였는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자들은 서애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위기를 벗어나자, 서애가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오도하였다는 주화오국(主和誤國)의 누명을 씌었습니다. 선조도 서애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텐데도, 서애를 파직하고 쫓아냈습니다. 토사구팽인 것이지요.

 

‘당동벌이(黨同伐異)’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당이면 무조건 옳다고 편을 들고 다른 당이면 무조건 그르다고 배척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자들이 서애를 평하는 글을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체포를 앞두고 일부러 서애를 도체찰사로 경기도 순시하라고 내보냅니다. 그리고 5일 뒤에 이순신을 처벌하라는 사헌의 소가 올라오고 이틀 뒤에 이순신은 체포됩니다. 이때 적극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구명에 나선 이가 우의정 정탁입니다. 아마 뜻을 같이하는 서애와 정탁은 이순신 장군의 구명에 관한 역할 분담을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조가 서애와 이순신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데, 서애가 순시하다 말고 조정으로 달려와서 이순신의 구명을 호소하였다면, 선조의 성격상 이는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오냐! 그래? 그렇다면 확실히 순신을 죽여야겠구먼.” 서애가 호소하였으면 선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더 강하게 나갔을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정탁이 나선 것입니다. 정탁도 선조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우선 이순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마당에 이순신과 같은 장군을 죽인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선조를 달랜 것입니다.

 

그리고 백 교수는 서애가 경기도 순시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무려 9차례에 걸쳐 연속해서 사직소를 올리고 있는 것은 이순신 체포에 대한 서애식의 선조에 대한 강력한 반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백 교수는 결론 부분에서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 한국 상황을 대비하면서 아래와 같이 안타까워하는 말을 합니다.

 

"자기 확신성이 강한 문화는 여전히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협력보다는 갈등과 투쟁을 우선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마치 420여 년 전의 당시 조선 시대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이 문제는 비단 정치인들만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문화 자체가 갈등과 대결로 분열된 상태에 빠지게 만든 우리 전체의 문제이고 책임이다. ‘국민은 항상 옳다’는 정치인의 달콤한 정치적 수사에 현혹되어 자만에 빠지거나 교만할 시간도 없다. 대한민국의 미래 지향점을 제시해 주고 국민적 에너지를 집결시켜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국민적 정신운동이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고 중요하다."

 

저도 백 교수의 오늘날 상황 인식에 적극 공감합니다. 후유~ 요즘도 ‘당동벌이’가 그대로 들어맞는 정치가 펼쳐지고 있으니... 그리고 백 교수는 이러한 점에서 서애 류성룡이야말로 오늘날에도 민족적 국민적 지도자의 사표로서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애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 수련과 수신을 놓지 않았고, 전통왕조라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도 과감한 개혁과 혁신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가지고도 상생적 협조적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원칙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라도 서애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국민정신 운동이 실체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백 교수의 염원이 저의 염원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벽하가 보내주는 《서애연구》덕분에 저도 서애 선생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서애연구》가 8권까지 이어지면서 저도 서애 선생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나날이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