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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판 ‘공부의 신’ 16인의 이야기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 이수광 / 해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90)

정숙하게 앉는 것은 공부하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 반드시 옷을 깨끗이 입고 자세를 엄숙히 한 다음 눈을 감고 코끝을 내려다보면서 망령스레 움직이지 않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이다. 뜻(情)이 움직일 때에는 그 생각이 어떠한가를 살펴서 알맞지 않으면 막아버리고 알맞으면 따라 행하되, 그 도를 이미 다했다면 예전처럼 고요할 것이다.

 

정숙하게 앉아 글을 읽는 모습. 이것이 옛 선비의 ‘공부하는 모습’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습이다. 위의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유명한 홍대용이 자신을 스스로 깨치는 말을 지어 의관을 정제하고 학문을 익힐 것을 다짐한 글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과거제도 때문인지 우리 문화는 유난히 공부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아무리 훌륭한 가문 출신이어도 ‘공부를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던 분위기, 출신보다 실력을 중시했던 사회 풍조가 수많은 문제 속에서도 조선 왕조를 약 500년 동안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역사 저술가인 이수광이 쓴 이 책,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은 조선 역사에서 공부로 이름을 날린 인물 16인을 골라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과 공부법을 소개하고 있다. 1부 ‘조선을 이끈 성리학의 선비들’에서는 점필재 김종직,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과 같이 비교적 ‘공부 천재’로 널리 알려진 이들을 담았다.

 

 

2부 ‘재능을 감출 수 없었던 여성 선비들’에서는 여성백과사전을 펴낸 빙허각 이씨, 빼어난 시로 이름을 떨친 난설헌 허초희, 여성 문학 동인을 결성한 금원 김씨, 성리학자로 명성을 날린 정일당 강씨를 소개한다.

 

3부 ‘실학으로 조선을 개혁하려 한 선비들’에서는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자연과학자의 길을 걸은 담헌 홍대용, 신문물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연암 박지원, 잊힌 발해의 역사를 저술한 영재 유득공을 다뤘다.

 

4부 ‘신분의 한계에도 학문을 사랑한 선비들’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들이 나온다. 일본을 들썩이게 한 천재 시인 송목관 이언진, 박학다식한 역관 성재 고시언, 고난 속에 글을 익힌 천민 선비 박돌몽, 스스로 ‘책만 읽는 바보’라 부른 청장관 이덕무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이는 조선시대 가장 낮은 신분인 종으로 태어나 학문에 정진한 ‘천민 선비’ 박돌몽이다. 박돌몽은 조선 후기, 대궐에 땔나무 숯을 공급하던 중인 신분인 ‘공인(貢人)’의 종이었다. 박돌몽은 마당을 쓸다가 주인 아들이 읽는 글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겼다.

 

(p.268)

박돌몽은 마당을 쓰는 것도 잊고 주인 아들의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를 한 줄도 놓치지 않고 외우기 시작했다.

“어떠냐? 들을 만하냐?”

주인 아들이 책을 읽다가 씨익 웃었다.

“예, 도련님 글 읽는 소리가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름답습니다.”

박돌몽의 말에 주인 아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도련님, 글은 어떻게 읽습니까?”

“어떻게 읽기는…이리 와봐라.”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주인 아들과 달리, 박돌몽은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다. 주인 아들은 이런 박돌몽을 신기하고 기특하게 여겨 글자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박돌몽은 주인 아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모두 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을 깨우쳤고, 닥치는 대로 글을 읽어 어느새 주인 아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 박돌몽은 혼인했다. 마음껏 공부하지 못하는 것을 계속 한스럽게 여기던 차에, 아내의 조언으로 젊었을 때 서리(문서를 다루는 하급 관리) 출신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정차후’라는 글선생을 만나 공부를 계속했다.

 

하루는 아내와 함께 삼각산 근처에 있는 탕춘대로 빨래를 하러 갔다가, 먹을 갈아 냇가에 있는 바위에 《소학》 구절을 썼다. 냇가에 있는 바위들이 글자로 가득해졌을 무렵 판서를 지낸 조진관의 아들이 봄나들이를 왔다가 그것을 보았다. 조진관의 아들은 조만영과 조인영으로, 조만영은 훗날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장인이 되었을 만큼 명문가였다.

 

박돌몽의 글솜씨에 조진관의 아들은 감탄하며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면천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박돌몽은 본인의 글 때문에 주인이 곤욕을 치를까봐 사양했다. 그러나 주인의 아들은 점차 자신보다 글을 잘하는 박돌몽에 앙심을 품고 매를 때리며 구박했다.

 

결국 핍박을 견디다 못해 주인집을 나온 박돌몽은 정처 없이 떠돌았다. 겨우 남양주에서 광주리를 짜서 생계를 잇고 있는데, 마을의 이장이 박돌몽을 지방군이었던 ‘속오군’에 넣어버렸다. 속오군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돈을 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박돌몽은 기적처럼 고위 관료의 수레인 초헌을 타고 지나가던 조진관의 아들을 만난다. 조진관의 아들은 사연을 듣고 박돌몽을 마침내 면천시켜 전옥서의 아전으로 일하도록 해주었다.

 

박돌몽은 비로소 생활이 안정되어 마음껏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박돌몽은 40살까지 아전을 하다 죽었고, 일개 종의 신분으로 경서를 읽은 그를 사람들은 선비로 대우했다.

 

이런 박돌몽의 사례를 보면 공부를 향한 이끌림은 참으로 막기 어려운 것이고, 공부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타고난 성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자세를 엄정히 하여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성향은 배우고 노력한다고 하여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공부를 좋아하는 성향일지라도 신분의 한계에, 또 시대적 한계에 막혀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이들의 울분 또한 무척 컸을 법하다. 오늘날에도 빈부 차이에 따라 공부에 뜻을 펼치지 못하는 예도 있지만, 적어도 신분이 낮아서 공부하지 못하는 일은 없으니, 역사는 느리지만 진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이 책에 소개된 16인의 선비들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그리고 공부의 길이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작가의 좋은 필력 덕분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갑진년 새해를 맞아 올해 무엇을 공부할지, 또 무엇을 배워나갈지 계획해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