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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 으뜸 융복합 인재, 정약용

《다산, 조선을 바꾸다》, 고정욱 글, 백대승 그림, 크레용하우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창의성에 대해서는 많은 정의가 있지만, 대체로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이리저리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기존에 있던 요소를 절묘하게 섞어 만드는 ‘융복합’이 창의성이라는 거다.

 

그렇게 보면 조선에서 창의성으로 으뜸가는 인재가 있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학자이자 정치가이고, 작가이자 교육자이고, 의사이자 건축 기술자였다. 요즘 말로 하면 문과, 이과가 다 되는 천재였던 것이다. 단지 문학, 사학, 철학만 잘한 것이 아니라 산술, 의학 등에도 능해 진정한 ‘융복합 인재’라 불릴 만했다.

 

고정욱이 쓴 책, 《다산, 조선을 바꾸다》는 ‘정약용에게 배우는 융합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정약용의 이런 다재다능한 면모를 조명한 책이다. 정약용은 ‘실학’의 선구자인 만큼 세상과 학문의 접목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늘 배우며 협력하고, 정보를 모으며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삶의 태도가 ‘유배형’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시련을 만났을 때 오히려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유배지에서 시간이 많았다지만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독자라면 이 책에 그 답이 있다.

 

정약용이 강진으로 귀양 간 지 5년 만에 마련한 다산 초당은 일종의 연구실이었다. 근처에 있는 뛰어난 제자들이 찾아와 그의 집필을 도왔다. 정약용이 자기 생각을 말로 하면 옆에 있는 제자 두어 명이 그것을 받아 적었고, 이렇게 빨리 흘려 쓴 초서를 몇 명의 제자들이 다시 바른 글씨로 옮겨 적었다.

 

다 적은 글은 가장 학식이 높은 제자, 황상이나 이청이 읽어보고 방 안 가득한 경전과 역사서를 들춰 보며 필요한 내용을 보충했다. 그러면 다시 다른 제자들이 틀린 글자는 없는지 교정을 보고, 마지막으로 정약용이 내용을 검토하고 머리말을 써넣었다.

 

이렇게 수많은 책이 나올 수 있었던 비결은 협업식 구조에 있었다. 제자 여러 명이 분야별로 글을 읽고 자료를 모아 정약용과 토론하며 만들었다. 제자 가운데 이런 일을 가장 잘한 사람이 황상과 함께 수제자를 다투었던 이청이었다.

 

이렇게 함께 ‘다산 연구실’을 지키던 수제자들의 말로는 조금 씁쓸하다. 1818년 정약용이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돌아온 뒤 강진에 남은 황상은 차츰 소식이 끊겼고, 이청은 같이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생각보다 스승이 중앙 정계에서 재기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결국 추사 김정희의 문하로 들어가고 만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천주학을 받아들인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모든 백성이 신분 차별 없이 힘을 합쳐 선하게 살면서 하늘나라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무척 마음이 들었다. 조선에 희망을 주는 새로운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조가 살아 있을 때는 학문으로 받아들여지던 천주교가 순조가 즉위하자 반대파를 탄압하는 정치 싸움에 이용됐다. 정약용은 한순간에 정치적 날개가 꺾였고, 성리학에 새로운 학문을 결합하려던 꿈도 좌절되고 말았다.

 

(p.71)

“왜 스승님은 성리학을 부정하셨나요?”

제법 생각이 깊은 제자들이 정약용에게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성리학이 처음에는 인간이 지혜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학문이었는데 이제는 종교처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천주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

정약용은 마음속에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들춰내며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천주학 때문에 이렇게 먼 곳으로 귀양살이를 오셨잖습니까?”

“이제는 괜찮다. 너희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나는 이제 이곳에서 책이나 읽고 바쁘고 번거로웠던 시간을 정리하려고 한다. 세상을 바로잡는 건 이제 너희들의 몫이다. 열심히 공부하거라.”

정약용은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정약용은 형인 정약전만큼 천주교에 깊이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정약용이 겉으로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독실한 신자였다고 주장한다. 정약용이 죽기 직전에 신부가 정약용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봤다는 것이 강력한 증거라는 것이다.

 

비록 천주교에 담긴 사상을 받아들여 성리학 일변도이던 조선을 바꾸어 보려는 의지는 좌절됐지만, 주어진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여전했다. 귀양 가서도 ‘하늘 천, 땅 지’로 시작하는 기존의 천자문 대신 ‘인의예지 효제충신, 자량돈목 관화공신, 시비선악, 길흉회린’ 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천자문을 만들어 가르쳤다.

 

무조건 기존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흡수한 뒤 문제점을 개선하고, 본인의 것으로 새롭게 세상에 내놓는 능력. 이것이 진정한 융복합 인재의 자질이 아닐까. 융복합은 문과와 이과 사이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과거의 문물을 오늘날에 맞게 정비해 새롭게 쓰는 능력 또한 아무나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배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치밀하게 엮어 새로운 결과를 내놓고,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능력은 필자도 퍽 닮고 싶은 자질이다. 항상 기존의 것을 개선할 방법은 없을지 궁리하고, 배운 것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할지 궁리한다면, 정약용만큼은 아니더라도 후세에 전할 만한 결과물을 남길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이 책, 《다산, 조선을 바꾸다》는 본인의 빛나는 능력으로 나라를 바꾸고 싶어 했던 다산의 꿈을 볼 수 있는 책이다. 비록 그의 바람만큼 나라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가 견지했던 삶의 태도를 배우고 닮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