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흥왕(540∼576)이 새로이 넓힌 지역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닌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입니다. 이 진흥왕순수비는 현재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33)·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3)·마운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1)·황초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0) 등 모두 4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가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대하던 진흥왕 때의 영토 개척사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진흥왕 때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 어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때입니다.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였고,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동북으로는 함경남도 이원지방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순수비는 그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순수비는 진흥왕 때 신라 동복쪽 국경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비열홀주(比列忽州, 安邊)를 훨씬 넘어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조선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는 7월 무더위 속을 뚫고 북한산에 올라 그곳에 있던 진흥왕순수비의 탁본을 했습니다. 그 뒤 그는 침식을 잊은 채 비문을 판독한 다음 그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힙니다. 대학자의 면모가 드러나는 일입니다. 진흥왕순수비도 우리의 국보지만 그를 탁본해 순수비임을 밝힌 추사도 우리의 국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