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는 예부터 밥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 밥의 종류도 무척이나 많았지요. 먼저 밥의 이름을 보면 임금이 먹는 수라, 어른에게 올리는 진지, 하인이 먹는 입시, 제사상에 올리는 젯메 등이 있습니다. 밥에도 등급이 있다는 말이지요. 물론 벼를 깎은 정도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는데 현미밥부터, 조금 더 깎은 7분도밥과 가장 많은 사람이 해먹는 백미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밥에 섞는 부재료에 따라서도 나누어집니다. 먼저 정월대보름에 찹쌀, 검은콩, 팥, 찰수수, 차조로 해먹는 오곡밥, 계절에 따라 나는 푸성귀(채소)나 견과류를 섞어서 짓는 밥이 있으며, 콩나물밥, 완두콩밥, 무맙, 감자밥, 밤밥, 김치밥, 심지어는 굴밥까지 있습니다. 또 계절에 따라서 밥 종류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봄에는 시루떡에 고물로 쓰는 팥을 넣어 만든 거피팥밥, 여름에는 햇보리밥, 초가을에는 강낭콩밥이나 청태콩밥, 겨울에는 붉은 팥 또는 검정콩으로 밥을 해먹습니다. 그밖에 1800년대 말 즈음 나온 조리서에 처음 등장하는 골동반(骨董飯)이라고 하는 비빔밥도 있고, 옛날 공부하던 선비들이 밤참으로 먹으려고 제삿밥과 똑같이 만들어서 먹은 데서 유래한 안동 헛제삿밥도 있지요. 헛제삿밥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어떻게 치러졌을까요? 여기 그 자세한 내용이 담긴 그림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한시각의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가 그것인데 세로 57.9cm, 가로가 674cm로 아주 큽니다. 한시각은 조선 중기의 화가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대나무 그림 2폭을 그리기도 했고, 송시열의 초상화도 그렸다고 전해지지요. 북새선은도는 화원화가인 한시각(韓時覺)이 1664년(현종 5년) 함경도 길주목에서 있었던 무과 과거 시험 장면을 그린 기록화입니다. 이 그림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 곧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는데 새가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하여 조감법(鳥瞰法)이라고도 합니다. 특히 이 그림은 드물게도 무과 시험 장면을 그린 것이지요. 문과시험을 주제로 그려진 그림은 흔하지만 무과시험 장면을 담은 그림은 아주 드뭅니다. 더구나 북새선은도는 무과시험장 주변에 휘날리는 군기와 천막들, 활 쏘는 모습, 표적의 모양 등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어 역사적 자료 가치가 특별히 더 높습니다. 또 이 그림은 기록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17세기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
누구나 알다시피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바다를 굳게 지켜 나라를 구했습니다. 따라서 그를 우리는 성웅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무신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나기만 해서 연전연승 싸움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그가 바다를 장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데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成大中:1732∼1812)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입니다. 이순신이 처음 호남 좌수사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중요한 부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바다 구석구석의 소용돌이치는 곳이라든지, 암초 등에 대해 백성들에게 들어서 소상히 알게 되었으며, 또 그것을 몸소 나가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곳 바다를 모르는 왜군을 맞아 완벽하게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길거리나 상가에 가보면 어느 나라에 와 있는지 모를 만큼 온통 영어와 한자를 섞어 엉터리 조어법으로 만든 광 고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예전 서울시가 “일어서自”라는 광 고를 내더니 이제 그 못된 짓을 산하기관인 지하철이나 심지어 작은 음식점까지도 이에 편승하는 데 열심입니다. 지하철 5호선 종로3가 역에는 수필 곧 “에세이”를 한자와 영어의 엉터리 조합인 “愛say”라고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이 글은 5678 도시철도공사의 좋은 글 공모전 광 고입니다. 좋은 글과 사랑 ‘애(愛)’ 그리고 영어 ‘say’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그냥 수필이라고 쓰면 촌스러운가요? 그런가 하면 음식점에서 주는 젓가락 봉투에 “24時 포장 ok”라는 문구도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우리 얼레빗은 얼마 전 “살가운 역 이름 알리기, 애오개·굽은다리·장승배기”라는 글을 써서 5678 도시철도공사의 한글사랑을 칭찬해줬는데 사실은 한글사랑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중국 연변자치주의 연변대학교 총장은 몇 년 전 한국에 와서 “만주족은 말에서 내린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은 타는 말보다는 입으로 하는 말을 이릅니다. 우리도 이러다가 흔적도 없이
79. 옥스퍼드 사전과 ‘쓰나미’ 사상 유례 없는 대지진의 재앙이 일본 열도를 휩쓸고 지나간 지 열흘째를 맞는다. 신문방송에서는 “엄청난 물기둥을 몰고 온 쓰나미가 일본 동북지방을 싹 쓸어 갔다”고 대서특필했다. 이웃나라 일이지만 우리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며칠 전부터는 일본을 돕자는 “성금 물결이 쓰나미처럼 한반도를 달구고 있다”라는 기사도 보인다. 3월에 때 아닌 구세군 자선냄비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지난 열흘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다. 일본인보다도 한국인들이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같고 보기에 따라서는 우왕좌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 며칠 새 티브이와 신문에서 맞닥트리던 ‘쓰나미’란 말은 이제 너무도 귀에 익어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말처럼 익숙해져 버린 느낌이다. 피해도 크고 분위기도 뒤숭숭한 판국에 누가 ‘쓰나미’란 말을 쓰지 말고 ‘지진해일’이란 말을 쓰자하면 몰매 맞을 분위기다. 일부 신문이나 방송국 기자들은 애써 '쓰나미‘란 말을 피하고 ‘지진해일’이라고 쓰고 있지만 대세가 ‘쓰나미’인 분위기다. 이번 일본 동북지방의 대지진으로 인해 한국 어린이들까지 확실히 ‘쓰나미’란 말을 익혔을 것 같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마지막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5.1) 과 그 일가가 입었던 옷 그리고 꾸미개(장신구)들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습니다. 영친왕 일가의 복식은 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1991년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으로부터 반환받았습니다. 이 유물들은 2009년 12월 중요민속자료 제265호로 총 333점이 지정되었는데 단일 지정문화재로서는 가장 많은 것입니다. 바로 국립고궁박물관은 이 유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이 유물의 내용은 임금 평상복인 곤룡포(袞龍袍)를 비롯하여 익선관(翼善冠)과 옥대, 목화와 왕비의 예복인 적의(翟衣) 등과 각종 비녀 꾸미개, 영친왕의 첫 아들인 이진의 돌옷을 포함한 옷으로 매우 귀한 것들입니다. 이 유물은 1957년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방자 여사가 일본에 30만 엔을 받고 넘긴 것들로 친필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지요. 얼마나 어려웠으면 귀한 것들을 헐값에 넘겨야했는지 황족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험난한 삶을 살다간 영친왕 일가에 연민의 정이 갑니다. 가족들의 손때가 묻은 옷마저 남의 손 그것도 일본에 넘겨줄 때 그 마음은 어땠을까요? 다행히도 이 소중한 유물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으니 고
“들하 노피곰도다샤”로 시작하는 ‘정읍사’를 우리는 국어시간에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정읍사는 멀리 떠나보낸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애절한 사랑의 노래라고 하지요. 그 정읍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음악 수제천(壽齊天)을 들어 보셨나요? 국악과 출신인 문성모 목사가 독일의 한인교회에서 대학생들에게 '한국적인 자각을 위한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서양음악과 국악을 비교하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 물음 속에는 서양 클래식을 대표한다는 “운명 교향곡”과 우리의 수제천“을 견줍니다. 그만큼 수제천은 우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수제천 악기 편성은 당초 삼현육각(三絃六角)인 향피리 2, 젓대(대금) 1, 해금 1, 장구 1, 좌고 1 등 6인 편성이었으나 지금은 장소나 때에 따라 아쟁·소금이 더해지는 등 달라지기도 하지요. 향피리가 주 선율을 맡고 있으며 대금과 해금이 향피리가 쉬는 여백을 받아 연주하는 연음 형식으로 장중함과 화려함을 더해 줍니다. 수제천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곡의 느린 속도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메트로놈으로 측정하기 조차 힘들다는 이러한 속도는 인간의 일상적인 감각을 크게 초월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제천은 한 박 한 박
7세기 일본 아스카시대의 유물인 나라 호류지 옥충(비단벌레)주자는 2,563장의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만든 작품입니다. 이 옥충주자는 지금 남아있는 600년 무렵 유물 중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본 것이냐 한국 것이냐 하는 논란 속에 일본과 한국 미술사를 깊이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코벨은 옥충주자에는 일본에 없는 호랑이 그림이 있고, 사천왕상이 있는 등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호류지 옥충주자처럼 비단벌레로 만든 유물이 경주에도 있습니다. 1973년 경주 황남대총 남분(임금 무덤)의 부곽에서 출토된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가 그것이지요. 비단벌레 날개를 촘촘히 깔아 붙인 이 말안장 뒷가리개는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말안장 뒷가리개 말고도 비단벌레로 장식된 유물은 화살통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사회에서 왜 비단벌레를 장식물에 자주 사용했을까요? 비단벌레 날개가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 외에 또 다른 까닭이 있습니다. 명·청시대 편찬된 중국 광동 지방 지리지인 광동통지에는 금화충(비단벌레)이라는 곤충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달고 다니면 사람들을 증미(增媚)하게 한다.”라는 기록이 있지요. 다시
중국인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 종이를 ‘계림지(鷄林紙)’, ‘고려지’, ‘조선지’로 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송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고려나 조선 사신들이 들고 가는 선물 목록에는 꼭 ‘종이’가 들어있었다는 데서 우리 종이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지요. 더구나 당시 중국 사람들은 우리 종이의 질이 비단으로 만들었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는데, 명나라 "일통지(一統志)" 때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오십보백보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이 조선정부에 대장경을 달라는 기록이 80여 차례 있습니다.이러한 잦은 일본의 대장경 요구에 조선 정부는 “지금 찍어 놓은 게 바닥이 났다. 종이를 보내면 찍어 주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1416년 (태종 16년) 10월 13일자에 일본에서 종이와 먹을 가지고 와서 대반야경을 인쇄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종이가 대장경을 인쇄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하고 형편 없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일본 종이가 세계적인 한지로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우리 것을 잊어갈 때, 일본인들은 오히려 역으로 자신 만의 것을 구축했던 것입니다. 최근 한국 영화
바둑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즐겼던 놀이의 하나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모두 좋아합니다. 그래서 바둑판을 아끼는 이들도 많았고, 대단히 아름다운 바둑판도 전해져 옵니다. 특히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바둑판과 알이라고 알려진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은 그 화려함이 대단하지요. 목화자단기국은 일본 왕실의 보물을 보관 하는 곳인 나라 정창원에 보관 중인데 상아로 새겨진 옆면의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 일본 왕실 보물이자 최고의 예술품으로 꼽힙니다. 그밖에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용과 호랑이 무늬 바둑판 용호문나전기반(龍虎文螺鈿碁盤)도 그 우아한 자태를 뽐냅니다. 또 재일동포가 운영하는 교토의 고려박물관에도 아름다운 바둑판이 있습니다. 바로 나전장생문기반(螺鈿長生文碁盤)이 그것인데 바둑판에는 십장생 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특히 이 바둑판은 16개 돌을 미리 놓고 두는 한국 고유의 바둑인 순장바둑판으로 요즘의 바둑판(45㎝×42㎝)과는 달리 45㎝×45㎝로 정 사각형입니다. 그리고 이 바둑판은 바둑돌을 놓을 때마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니 가히 예술작품이 아니고 무엇일른지요. 바둑의 다른 이름은 혁(奕)·혁기(奕棋)·위기(圍棋)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