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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나주시 남산공원에 세웠던 나주신사 터를 찾아서<4>

황국화 상징 조선의 신사(神社) 돌아보기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신사숭경(神社崇敬)은 실로 일본의 국체관념(國體觀念)의 반영이다. 신사에서 봉납되는 제사는 황국국체(皇國國體)로 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이한 일이다. 일본민족은 개국 이래 신사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왔다. 신사는 일본민족의 향토생활의 중심인 것이다. 이러한 신사는 본토를 떠나 멀리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정신생활의 중심이다. (중략) 올해로 성전(聖戰) 5년에 접어들어 지금 일본민족이 전면적으로 대륙으로 진출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목표 아래 흥아(興亞)의 대업완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며 신사는 일본의 대륙진출의 중심지이다.”  

위는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만든《대륙신사대관, 1941》머리말에 나오는 말로 조선 내에 신사를 만든 이유를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슨 까닭인지 1940년(소화 15) 11월 현재 전국 13도 가운데 유독 전라남도에만 신사를 많이 세웠다.

                 <전국의 신사>

 

신사(神社)

신사(神祠)

경기도

5

67

충청북도

2

16

충청남도

7

30

전라북도

10

20

전라남도

8

226

경상북도

5

47

경상남도

7

37

황해도

2

27

평안남도

2

21

평안북도

4

37

강원도

2

35

함경남도

2

20

함경북도

5

19

*1940년 11월 현재로 신사(神社)가 신사(神祠)보다 격이 높다

 위 도표에서 보듯이 다른 곳은 십 수 개 정도인데 유독 전라남도에만 232개의 신사(神祠, 神社 포함)가 세워진 것이다. 나주신사가 있던 곳을 찾아 간 것은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신사는 항상 그 지역에서 가장 신성한 땅을 골라 짓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대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게 된다. 나주신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 나주신사

 나주신사가 있던 남산공원 팔각정을 오르니 나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마침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 몇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누기에 다가서서 예전에 있었던 나주신사에 대해 물으니 “처음 듣는 소리”란다. 줄곧 나주에 살았다고 하는 이 분들은 7~80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분들인데도 나주신사에 관한 것은 전혀 모른다고 했다.

   

▲ 망화루 문사이로 멀리 팔각정이 보이는 데 여기에 나주신사가 있었다.

   
▲ 팔각정 귀퉁이의 안내문에는 신사이야기가 빠져있다.

전주신사 터에 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전주 다가동의 전주신사터를 찾아 갔을 때는 등나무 아래에 모여 있던 어르신들이 앞 다투어 신사 터를 안내해주었다.

.일제가 만든《대륙신사대관》1941년 판에 나주신사 사진이 번듯하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때까지는 나주신사가 존재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헐린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

 아무렴! 일본정신의 상징인 신사를 고이 모셔둘 수야 없는 일이었으리라. 해방과 동시에 부숴버려 그 흔적조차도 안 남긴 것은 어쩜 잘 한일인지도 모른다. 통쾌한 일 일 수도 있다. 물론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할 수 있겠지만 흔적도 없이 부숴버린 심정을 헤아리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사를 잘 부쉈다’거나 '보존하지 않았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없어지긴 했지만 역사의 흔적으로 전주시처럼 '신사터’를 알리는 작은 안내판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에 하는 말이다.

   
▲ 팔각정으로 오르는 입구

 나주신사는 1913년(대정 2) 7월 1일 호남선 나주역 개통 기념축하회 석상에서 나주신사의 건설 의견이 나왔다. 그때 장소로 지목 받은 곳이 남산공원이었다. 1915년(대정 4) 3월 데라우치 총독의 남부지역 순시 때 '나주신사(羅州神社)' 4자의 휘호를 받았고 그 뒤 철도공사 청부업자인 인천의 누나미(沼波石松)씨와 이리의 고다마(兒玉吉太郞)씨 두 사람의 사전(社殿)기부금과 나주시민의 기부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1916년(대정 5) 4월 15일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으로부터 황대신어분령(皇大神御分靈)을 받아와 목포신사의 사장(社掌, 신사책임자)인 다카하시(高橋種之)씨의 주재로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남산공원의 신사 건립에 관여한 인물은 서무주임 쿠라시나(倉品益太郞), 학교조합 관리자 코이소(小磯實), 나주시구개정위원장 야마카와(山川一二), 나주우편소장 고이즈미(小泉孝治), 학교조합의원 곤노(今野直松)씨 등 이었다.

나주신사는 1937년(소화 12) 9월 8일 창건되었으면 주신(主神)은 일본의 국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조선침략의 원흉인 명치천황(明治天皇)이다. 초대 사장(社掌, 신사책임자)은 하타노(羽田野人) 씨였다.

혹시나 남산공원에서 나주신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공원 입구에서부터 팔각정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신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팔각정자리가 신사본전(本殿)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지만 팔각정과 망화루 사이의 제법 펀펀하여 공간도 신사가 들어 설만한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팔각정 아래 뜻 모를 돌 하나, 신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좀더 알아보고자 남산공원관리사무소에 들어가 마침 당직 중인 직원에게 나주신사에 대한 것을 물었으나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고갤 흔들었다. 팔월의 무더위가 끝나갈 무렵이긴 해도 팔각정 위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후텁지근했다.

끈적끈적한 습기가 피부에 닿아 불쾌지수가 높았지만 혹시나 주춧돌 하나라도 남아 있나 싶어 열심히 찾아보았다.흔적찾기에 몰두해서일까. 지금은 잔디가 심어진 망화루 뒤켠에 커다란 돌 하나가 눈에 띄어 다가가 살펴보았지만 우스운 일이었다. 이 돌덩이가 무엇을 말해준단 말인가!

 자신이 모시던 조상도 아닌 침략국 일본의 국신(國神)인 아마테라스오오카미( 天照大神)와 조선병탄의 주범인 명치왕을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던 뼈아픈 역사의 현장은 그러나 아무런 표시도 해두지 않은 채 시민들은 오늘도 그 치욕의 자리인 팔각정에서 막걸리 잔이나 기울이고 있었다. 그게 더 슬펐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 망각의 역사는 반복 된다’는 말을 곱씹으며 나는 오래도록 남산공원을 뜨지 못했다.

 

   
 

       <나주신사(羅州神社)>

*소재지:전라남도 나주군 나주읍(全羅南道羅州郡羅州邑, 현 남산공원)
*제신(祭神):천조대신(天照大神),명치천황(明治天皇)
*창립일:1937년 (소화12)9월 8일
*사격(社格): 읍공진사(邑供進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