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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송춘희 <수덕사의 여승>(하) 석존 품에서 ‘완전한 사랑’ 꿈 이뤄

[디제이 김상아의 음악편지 19]

[한국문화신문 =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수덕사의 여승  

백성욱이 떠나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자 김원주는 그를 잊기로 한다. 그렇게 결심이 선 이상 잊힐 때까지 기다릴 김원주가 아니었다. 신문사 기자인 국기열을 사귀기도 하고, 대처승 하윤실과 결혼을 하면서까지 백성욱을 잊으려 발버둥쳤으나 그의 빈자리만 커질 뿐이었다. 하윤실과의 결혼도 파경으로 끝나자 그제서야 그녀는 백성욱의 참뜻을 이해하고 수덕사로 향한다. 

하지만 불제자가 되었다고는 하나, 백성욱을 향한 불길이 쉬 꺼지질 않아 몸부림치고 있을 때 예기치 않은 아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일본에서 돌아온 뒤 오다 세이조와의 관계라든가 아들 오다 마사오에 관해서는 일절 입을 다물었었다. 다만 꿈길로만 오는 아이라는 시를 써서 모성애의 흔적을 남기긴 하였다. 

김원주는 눈물범벅이 되어 달려드는 아들을 얼음장처럼 냉정하게 대했다. 자신에게 젖 한번 물리지 않고 버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품에서 단 하룻밤이라도 자보려는 소망을 안고 찾아온 오다 마사오 아니, 송영업 소년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양부모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영업은 방학 때마다 수덕사를 찾았고, 절 아래 여관에 머물 때 어머니 친구인 나혜석을 만나 그림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그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김태신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명한 화가로 성장하였다. 김일성 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초상화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또한 64세에 출가하여 일당이라는 법명으로 불제자 길을 걷고 있다. 

여성의 정조는 육체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는 신 정조론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며 완전한 사랑을 찾기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일엽 김원주! 그녀는 마침내 석존의 품에서 그 꿈을 이루고 197176세의 일기에 기나긴 오디세이를 마친다.  

송춘희는 1960년대 중반 신민요 풍의 노래로 인기를 모았다. 특히 강원도 유람가세’, ‘뽕따는 평창아가씨’, ‘문경 아가씨’, ‘서귀포 아가씨’, ‘영덕은 내 고향등 지명이 들어간 노래를 많이 불렀다. 

66년에 나온 <수덕사의 여승>은 그녀의 최고 히트곡이기도 하지만 종교관을 바꾸어 놓은 곡이기도 하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르기 전에는 절()은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노래가 인기를 끌자 일엽스님을 모델로 한 노래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일엽스님 제자들이 몰려와 항의하기에 이른다. 

송춘희는 그때 비로소 일엽스님의 지난 일들을 알게 되었고 스님 또한 자신처럼 목회자의 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곧이어 불교로 개종한 그녀는 80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법사라는 호칭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