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황희와 더불어 황금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맹사성(孟思誠)이다.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부터 세종 20년(1438)까지의 문신으로 태종과 세종 시대 사이 6조를 두루 걸치며 참판과 판서를 지냈고 세종 9년(1427)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좌의정이던 황희와 한 팀을 이루었고 이후 세종 13년(1431) 황희가 영의정이 되자 좌의정에 올라 조정을 관장했다. 76살이 되던 세종 17년(1435)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세종은 주요 정사에 대하여서 자문했다. 온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의 맹희도(孟希道)이며 고려 말기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우왕 12년(1386)에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동부대언(同副代言)ㆍ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그는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했으나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연대기를 음악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태종 조에서 성종 조까지의 문신 정인지는 조선 태종 때부터 세종 그리고 문종과 단종 그리고 세조와 예종 다시 성종 때까지 활약한 유학자이자 공신이다. 정인지는 조선전기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부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태조 5년(1396)에 태어나 성종 9년(1478년)에 죽었다. 태종 11년(1411) 생원시에 합격했고, 태종 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 즉위년(1418)에 병조좌랑을 거쳐 세종 3년에는 상왕(上王 : 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라는 말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되었다.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ㆍ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세종 6년에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다음 해(1427)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한다. 세종 13년(1431)에는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 《칠정산 내편》 : 중국 최고의 역법으로 알려진 수시력(授時曆)을 바탕으로 하는 재래의 동양역 법. 세종 24년(1442)에는 예문관대제학으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이순지(李純之, ?∼1465)는 세종 때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조선 전기 대표 천문학자다. 이순지의 출신배경은 장영실과 다르다. 양반 출신에 문과시험도 급제한 문관 관료다. 이순지는 세종 9년(14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운관 판사 등을 거쳤고, 문종 때에는 호조참의 그리고 단종 때에는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한성부윤(현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많은 사람이 세종 때 과학자 하면 장영실을 떠올리지만, 업적으로 따지면 이순지도 장영실 못지않다. 문관 출신이지만, 한양의 위도를 맞출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순지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천문학자가 된 것은 25살인 1430년 무렵에 세종이 선발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후대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465년 (행 상호군 이순지의 졸기) 행 상호군 이순지가 졸(卒)하다. 이순지의 자(子)는 성보(誠甫)며, 정미년(세종 9년, 142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세종은 달력에 의해 천체의 운행을 추정하는 일이 면밀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算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순지가 근본을 캐어 들어가 연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조에 무인 출신으로 세종의 천문의기제작 프로젝트에 이천이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자 이후 명에 따라 실무연구팀을 구성했다. 이 연구팀에는 장영실이 제작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당대의 천문학자인 이순지가 이론을 뒷받침하여 먼저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를 제작했으며 계속하여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을 만들어 냈다. 간의대 설치 이전인 세종 18년(1436)에는 천문의기 제작사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고 있을 무렵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야인(野人)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은 이듬해에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야인정벌의 명을 내렸다.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상언하기를, "대완구(大碗口)가 너무 무거워서 싣고 부리기에 어려워서 실제로 쓸모가 없고, 오직 중완구(中碗口)가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하지만, 소에게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小碗口)는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게 다시 만든다면 말에 싣는 데 편리할 것입니다. 신이 본도에서 감독해서 만들려 하오나 도내에서 철물이 없사오니, 청하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이천(李蕆, 1376∼1451))은 세종시대가 낳은 과학자의 한 사람인데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주요 실적을 확인해 보자. 세종 3년, 구리판 : 구리판을 다시 잘 주조한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다. (《세종실록》 3/3/24) 세종 10년, 성터 살핌: 공조 참판 이천을 함길도 경원 등지에 보내어 성터를 살펴 정하게 하다. (《세종실록》 10/7/21) 세종 13년, 쇠고리 제작: 근정전 등에 화재시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게 하다. "근정전(勤政殿)이 높아서 만일 화재가 있다면 쇠고리를 연쇄(連鎖)하여 처마 아래로 늘여 놓았다가, 화재가 있으면 이를 잡고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 근정전·경회루·사정전· 인정전 등에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세종실록》 13/1/2) 세종13년: 이천으로 하여금 노궁(弩弓)의 제도를 살펴보고 만들게 하다. (《세종실록》 13/5//17) 세종 14년: 지중추원사 이천이 선척을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을 힘써 진언하다. (《세종실록》 1412/18) 세종 16년: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주자(鑄字)를 만들어 책을 박도록 하다. 지중추원사 이천(李 蕆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으뜸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까닭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은 장영실이 노비 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으뜸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국사학과 교수들은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서울대 문중양교수)를, ‘이순지와 이천’(전북대 김근배교수)을 꼽았다.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은 2003년 1월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사회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마련했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과학기술인 15인 가운데 세종 때 △이천 △장영실 △이순지 3명이 들어갔다. 세종대왕의 재위 기간인 1418∼1450년은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볼 때 국책사업으로 과학기술을 이끌어 천문학은 물론 활자 인쇄, 도량형, 화약, 농업, 의약, 음악 분야 등 과학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세종이 임금이 된 1418년은 아직 새 왕조가 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 세종 때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영실(1390년경~?)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든 인물이다. 세종은 ‘임현사능’ 곧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다.”(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세종실록》 14/4/28) 이에 따라 장영실은 세종 5년 관노에서 벗어나 상의원 별좌 자리를 받게 되었다. 이후 세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여러 기구를 만들었는데 천문기구는 자격루, 혼천의, 혼상,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간의대 등이고 이를 종합해 세종 20년에 흠경각을 세운다. 흠경각 이루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지은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예전을 돌아보건대, 임금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주는 중요한 방법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 (璣衡)과 의
[우리문화신문=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의 치세에 도움을 준 조력자들을 살피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장영실이다. 장영실의 등장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다. 다음은 그 재능을 눈여겨 본 태종과 세종의 인재 알아보기이다. 더불어 그를 통해 당시 신분사회의 벽을 헤쳐 나가는 세종의 개혁정신이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조선 세종 대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영실(1390년경~?)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행주 사람으로 중국에서 온 장성휘로 귀화인이다. 아버지 집안은 노비 출신이 아니나, 어머니 기생 신분을 따라서 동래현의 관노로 태어났다. 중국인 김새 등 7명이 여진족에 붙잡혀 있다가 조선으로 도망왔는데 김새는 금은 제련기술이 뛰어났다. 이에 관에서는 장영실에게 김새의 제련기술을 전수받게 했다. 동래현에 있던 장영실의 재주가 차츰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태종이 그를 발탁하였다. 후에 나온 실록 기사를 참고해 보자.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蘇州)·항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 음악의 박연 세종 시대에는 주위에 인물이 많았는데 유독 그 시대에 인물이 많았던 것인가 아니면 세종이 인물들의 능력을 북돋아 키웠는가는 논의해 볼 일이다. 즉 인물이 자랐느냐 인물을 키웠는가는 의문인데 유독 그 시대에만 인물이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유학(儒學)을 신념으로 세운 조선에서 중시한 것은 예와 악이다. 주희의 신유학에서는 예법을 법에 의한 사법(司法)보다 위에 두었다. 예법에는 국가나 개인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의 길례, 손님을 맞는 빈례, 혼인의 가례, 흉사 때의 흉례, 군사 행렬 시의 군례다. 이 중요한 개인, 나라에서의 행사에 수반되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국가를 마음으로 잇는 길이고 수단인 것이다. 세종 시대에 음악에 있어서는 박연이 눈에 띤다. 향악 음악을 정리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음악에서의 독창성 혹은 자주적인 음악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발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세종 12년 세종은 당시에는 혁명적인 즉 전통이며 그때까지는 정통이라 할 중국음악 즉 아악에 이의를 제기하는 혁신을 제안한다.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때 북방족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여서 노략질 형태로 쳐들어오곤 했다. 그러기에 평시에도 상대방 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어야 할 첩보에 민감할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정보전의 모습이었다. 세종의 업적은 여럿 있지만, 훈민정음[한글] 창제 이외에 여진족 토벌을 통하여 대규모 백성을 이주시킨 사민입거(徙民入居) 그리고 압록강 인근의 4군과 두만강 인근의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을 확장한 일도 있다. 파저강 1차 전투 파저강(일명 동가강) 일대에 걸쳐 사는 야인(여진인)들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를 이용해 조선의 강계ㆍ여연 등지를 자주 침입해 사람을 살상하고, 소와 말, 재물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파저강 야인정벌(婆猪江野人征伐)은 1, 2차로 행해졌다. 1차 정벌은 세종 15년(1433) 4월 10일에 압록강 중류지방의 여진인을 정벌하게 되었다. 정벌군의 총사령관에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閏德)을 임명하고 평안도의 마보정군(馬步正軍) 1만 명과 황해도 군마 5,000필을 징발해 모두 2만 명의 군대를 4월 10일 강계부에서 7대로 나누어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 정벌에서 생포된 여진인은 모두 248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