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큰 전투 가운데 하나로 파저강 전투가 있었다. 당시 북방족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여서 노략질 형태로 쳐들어오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평소에도 상대방 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바로 첩보를 이용한 전투가 활용되게 되었다. 세종 때 북방을 총괄한 장군 중에 김종서(1383~1453)가 있다. 부친은 무과 출신이나 그는 몸이 왜소하고 책을 좋아하고 시문을 가까이해 16살 되던 태종 5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6진 개척을 주도한 인물로, 그리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서 살해된 인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300여 년이 지난 영조 대에 복권되면서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현장에서의 김종서는 세종초 이전부터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벌도 받다가 세종 즉위년 11월 강원도 주민의 토지 감사에 대한 불만을 현지에 가서 조사하고 기민(饑民) 729명의 조세를 면제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당시 변계량이 조세를 감면해 주는 일은 “가난하여 조세를 면제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고 그리되면 국고가 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큰 전투가 몇 번 있었는데 대마도 정벌과 두 번의 파저강 전투다. 대마도의 왜인들은 평시에도 우리 바다에 드나들며 고기도 잡고 상행위도 하고 때로 약탈도 일삼았다. 한편 북방족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여서 수시로 떼를 지어 쳐들어오고는 했다. 주로 노략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마도와 달리 북방족에 대하여는 평소에도 상대방 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어야 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대비로 평소에도 첩보의 체제가 갖추어져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공험진과 주민 이주 국가란 영토, 주민 주권으로 이루어지는데 세종 시대의 북방정책의 영토 개념은 황무지의 개간이 된다. 국경을 지키려면 사람이 살아야 하고 사람이 살려면 양식이 있어야 하고 양식을 얻으려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땅을 개간해야 했다. 따라서 북방의 장군은 국경을 지키는 것만큼 토지 개간에도 힘을 썼다. 오늘날에는 국토의 개념이 경제력, 언어, 종교, 문화, 사이버 영토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세종 시대에는 영토의 확보와 이에 따른 주민의 이주 등이 초점이었고, 그래서 파저강 전투 1, 2차는 전쟁이 아닌 적극적 방어책이었다. 세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다. 세종 때는 작은 전쟁이라 할 이민족과의 전투로는 대마도 정벌과 파저강 전투가 있었다. 전투에서는 영웅 내지 관심받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하나로 대마도 정벌의 이종무가 있다. 이종무는 고려, 태종 때부터의 인재라 할 수 있다. 대마도 정벌은 태종의 지휘로 이루어졌으나 세종대에 이루어진 일이라 세종의 치적으로 이어진다. 오늘날에는 일본과의 마찰 연장 선상에서 왜구정벌이라는 상징적 공적 때문으로 대마도가 자주 논의되기도 한다. 이종무(李從茂, 1360년~1425년)는 공민왕 때 태어났고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조선 건국 뒤에도 태조에서 세종에 걸쳐 조선 초기 4대 임금을 모셨다.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이방간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대마도정벌 일본 왜구는 고려 말부터 자주 조선반도를 침입하고 있었다. 세종 1년 5월에 충청도 비인현(서천)에 수백 척의 왜인 배가 침입해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과 교역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이에 세종 1년 마침내 태종이 주관하여 6월 19일 그들이 비어 있을 대마도 정벌이 이루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20년 4월 12일 중시(重試)가 있었다. 33명이 합격했는데 그 중 하위지(河緯地)가 27살의 나이로 장원을 차지했다. 시험 과제는 ‘국정에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내라는 것’이었는데 하위지는 임금과 언관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내용을 적어냈다. 그러자 조정과 신료들 사이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대사헌 안숭선ㆍ이승손ㆍ강진덕 등 10여 명의 사헌부 대간들이 사직을 청하게 되었다. 하위지의 간언 먼저 대사헌 안숭선(安崇善)이 사직하여 말하기를, "신이 본시 유약한 힘으로 중임(重任)을 맡고서 스스로 맞지 않음을 헤아리고 부끄럽던 차에 탄핵을 당하였으니, 그 죄를 달게받고 물러남을 편하게 생각하였사온데, 그대로 본직에 돌아가게 하시니 근일에 와서는 몸과 기운이 파리하고 피곤하며, 바라옵건대, 직무를 해면케 하시고 한산한 곳에 버려두시어 온전히 의약의 치료나 받게 하옵시면, 성은에 보답도록 하겠나이다." 다시 집의(執義) 이승손(李承孫)이 사직하여 말하기를, "청하옵건대, 신의 직임을 해면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장령 강진덕(姜進德)ㆍ지평 민건(閔騫), 그리고 우사간 임종선(任從善) 등이 역시 글을 올려 사직하며, 아뢰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생각하는 정치가다. 그렇다면 세종의 일상 정치를 통해 세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로 황희 정승의 사의 파동에 대한 대응이다. 황희(1363~1452, 호 방촌-厖村)는 개성 출생으로 우왕 시절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이후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태조 3년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사직 파동 이후 황희의 사직 파동은 여러 번 있었다. 1415년 송사문제, 1418년 양녕 옹호, 1427년 서달 사건, 1430년 제주 말에 연관한 태석균 등의 사건이다. 그는 모질지 않은 성품 탓에 청탁 뇌물 수수 등의 비리사건에 자주 연루되었다. 세종 10년에 황희가 박용 등의 문제로 사직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자 사퇴파동이 있었다. 그러나 복직되고는 했다. 영의정 재직 중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다가 1431년 복직되었다. 69살 되던 1431년(세종 13년) 9월에는 영의정부사 자리에 올랐다. 14년에는 황희가 1363년생이니 70살이고 세종은 36살이다. 당시는 ‘인생 70 고래희’라고 하여 70살까지 사는 사람이 드물 때다. 이제는 고령인 까닭으로 사직서를 올린다. "엎드려 생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생각하는 정치가다. 그렇다면 세종의 일상 정치를 통해 세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로 황희 정승의 사의 파동이 있다. 황희의 사직파동 - ① 세종은 스스로 학문이 탄탄한 면이 있어 여러 가지 제도 개혁부터 과학적인 창제에 이르기까지 좋은 업적을 쌓았지만, 그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은 훌륭한 인재를 옆에 두고 잘 활용했다는 것이다. 세종과 후대의 정조 임금을 조선왕조에서 높이 올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종의 인재 가운데 행정 분야에서는 황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황희(黃喜, 1363~1452, 호 방촌-厖村)는 개성 태생으로 우왕 말기 진사시에 합격, 창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태종 2년(1402)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하였다. 태종 8년 민무휼 등의 횡포를 제거하였다. 18년에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충녕대군 세자 책봉)을 적극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 그때도 유배라기보다 일선에서의 후퇴였다. 이어 세종 4년(1422)에 상왕(태종)의 진노가 풀려 의정부 좌참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사초(史草) 임금이 되는 순간 두 가지 규율 속으로 들어간다. 그 하나는 경연을 이어가야 하고 다른 하나는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임금의 말과 행위는 사관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겨져야 한다. 임금은 현재에 사는 게 아니고 미래에 사는 것이고 평가도 현재에서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받게 된다. 임금은 개인이지만 가문(家門)이고 가문이지만 국가가 되어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직후,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에게 이방과를 보내어 정몽주의 죄를 따질 것과... 결국 공양왕의 굴복을 받아 내어(《태조실록》 총서 131번째 기록) 곧이어 ‘화가위국(化家爲國, 집안이 변하여 나라가 됨)’하였다.” 한 가문이 변하여 나라의 기초가 된 것이다. 조선이 시작되고 역사기록은 이어진다. 개인에게 족보와 문집이 남겨지듯 마치 이의 연장선에 사초가 있는 듯하다. (왕가의 어진과 족보는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한다.) 사초(史草)란 좁은 의미로는 전임사관인 예문관 봉교ㆍ대교ㆍ검열이 남긴 역사기록의 초고(草稿)며, 넓은 의미로는 전임사관과 춘추관 사관이 남긴 기록을 포괄하는 말이다. 사초는 두 부로 작성되는데 하나는 사관들이 자신의 견해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경연과 사초기록 그간 몇 회에 걸쳐 세종의 사맛 가운데 ‘마음 나누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앞으로는 세종의 정사(政事) 속의 일화나 정치의 일상사를 통해 세종의 사맛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세종은 임금이다. 임금은 하늘 아래 으뜸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는데 그렇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럴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전제조건으로 커다란 규제가 가로막고 있다. 그 하나는 경연을 계속하여야 하고 다른 하나는 침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 이외에는 사관이 그 행동을 기록한다. 올바른 임금의 길을 가기 위하여 하루에 3번까지도 경연에 참여하여야 하고 낮과 밤에 궁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실록》 혹은 《승정원일기》로 기록되어 임금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된다. 실록은 후세의 심판을 받는다는 큰 뜻이 있지만 동시에 영상(映像)이 없던 시대여서 그러하지 모든 행동이 거울에 비치듯 문자로 남겨지는 행동의 복제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실록》에서 경연(經筵)이란 단어를 찾아보자. 전체 12,470개 가운데 200여 회 이상 임금은 다음과 같다. 세종(2,011), 문종(240), 성종(4,332), 연산군일기(82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살피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사람이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 뜻을 세우는 과정을 살펴보자. 사람이 어떻게 하여 흐려진 본성을 찾아 갈고 닦아 새로운 사람에 이르는가를 모색하는 일은 유교의 명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세종실록》에서 여러 사례를 찾아 그 길을 찾던 중 아래 <삼강행실(三綱行實)> 반포의 글[교서]을 새삼 꼼꼼히 읽어보게 되었다. 세종의 사유를 이리도 명쾌하게 요약해 놓은 글을 여러 곳을 빙빙 돌다 찾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삼강행실 인쇄하여 반포하고 가르치도록 하라 삼강은 사람 도리의 큰 틀이다. 고금의 사적을 편집(編集)하고 아울러 그림을 붙여 만들어 이름을 <삼강행실>이라 한다.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려고 한 것이다. 정음문자[훈민정음]가 생기기 이전 시대의 한문 교서로 편찬할 수 있는 세종의 시책을 볼 수 있다. 세종실록 16년 4월 27일의 한문 교서를 찬찬히 보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생각건대, 하늘이 준 바른 덕과 진심(降衷)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이 똑같이 받은 것이라, 인륜을 지켜 풍속을 이루게 하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자신지리(自新之理) 세종의 사맛 곧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살피고 있는데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려면 잘한 일, 잘못한 일을 늘 마음에 새기며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세종의 마음과 행동의 관계에서 마음을 가다듬어 새사람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갱생과 개심 황희는 정승에 임명된 8달 뒤인 세종 9년 1월 사위의 살인옥사에 개입하여 우의정 맹사성과 함께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 세종 12년에 뇌물과 간통사건으로 제주도 태석균의 청탁사건에도 휘말렸다.(《세종실록》12/11/14) 이후부터는 청백리로 거듭났다. 처음에는 간악한 소인(《태종실록》16/6/22)이었으나 그만두었을 때는 명재상(《세종실록》31/10/5)이 되어 있었다. 잘못한 일로 물러난 부정적 사건을 허물을 벗게 하고 다시 그 직분을 계속하게 기회를 주는 것은 바로 긍정적인 변역(變易, 고쳐서 바뀜)이다. 개심역려 : (야인의 습격을 고하지 않은 김윤수에게 재임을 허락하다.) 여연군사(知閭延郡事) 김윤수(金允壽)는 야인이 죽이고 사로잡아 간 인구와 우마(牛馬)를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