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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동해안 포항 깊숙한 곳에 자리한 천년고찰 '보경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포항 북구 송라면에 있는 내연산 보경사를 찾았다. 보경사는 창건연대가 602년으로 14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보경사를 창건한 스님은 통일전 신라 지명스님으로 스님은 신라 진평왕 때 중국의 진나라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때는 중국도 수나라로 통일 전에는 많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전란의 시대로 위진남북조시대였다. 그 때 진나라의 어떤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을 전수 받았다. 그런데 그 도인은 신라 땅 동해안 명산을 찾아 명당에 터를 잡고, 자신이 전해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절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삼국이 통일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지명스님은 이런 '팔면보경'을 전수받고 전해들은 사연을 진평왕께 고하자, 진평왕은 크게 기뻐하며 동해안 명산을 물색하던 중 내연산 아래가 명당터임을 알고, 산아래 큰 연못 속에 지명스님이 전해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흙으로 메워 터를 다진 후 금당을 세우고 그 절 이름을 보경사(寶鏡寺)라 이름하였다. 즉 '팔면보경'을 묻고 그 거울의 신비한 힘과 부처님의 위신력에 국태민안과 삼국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스며있는 절이 된 것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723년 성덕왕 때에는 '각인'과 '문원'이라는 장자가 있었는데, 이들이 보경사를 찾아보고 절이 있는데 탑이 없어서야 되겠나 하면서 크게 시주를 하여 금당 앞에 5층석탑을 짓게 되었다. 이렇게 이어져 오던 보경사는 한국의 대부분 사찰의 흥망성쇠의 역사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고려이후 흥성함이 조선이 들어서자 쇠퇴의 길을 걸었다. 더구나 조선 중기 국가의 존망이 걸린 임진왜란을 당하자 사찰 내 석재로 된 구조물을 제외한 모든 건축물이 소실되는 아픔울 겪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허허벌판 같던 경내는 그저 사찰의 흔적만이 전해내려오다가,  70여년이 지난 1677년 숙종 때에 이르러 '도인'스님이 다시 중창불사를 이끌어 금당, 영산전, 관음전, 명부전, 국사전 등을 하나 하나 다시 세우게 되었고, 주변에 산내 암자들도 하나 둘 다시금 세워졌다.

 

동해안 포항 내연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보경사에는 중국의 '도인'이 전수해준 '팔면보배거울'을 묻고 절을 지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제는 다시금 잘 가꾸어지고 주변 소나무 숲이 울창한 자연과 그 자연속에 깊숙히 자리잡은 큰 절 모습이지만 지나온 역사만은 다시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보경사를  돌아보면서, 터를 잡은 뒤 행적을 남기신 큰 스님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흥망성쇠의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그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부처님 설법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고요한 가운데 모든 시름 내려놓고 잠시 마음을 쉬어본다.

 

보경사에는 정혜쌍수를 주창하며 고려시대 선풍을 크게 날리신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인 원진국사가 주석하여 사찰의 경내를 크게 중창하고 이곳 포항에도 선풍을 날렸다고 한다. 원진국사는 열반에 드신 후에 국사로 추증되었는데, 경내 가장 깊숙한 곳에 세워진 승탑이 그의 승탑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명부전 앞에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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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