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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돌아보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그리며 통일을 기원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왕조가 문을 닫고,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중국에 대한 주종관계를 청산하였다. 이는 다분히 일제가 중국의 간섭에서 벋어난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충동질도 있었지만, 어떻든 대한제국은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국으로 그것도 황제국으로 일신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이름만 바꾼다고 기울어 노쇠하고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리던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나라를 살리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고,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많은 대신들은 백성도 속이고 황제도 속이면서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하여 이들은 일본정부로부터 후작 백작 등의 작위를 받고, 또 나라를 팔아먹은 공로로 전국 곳곳에 토지를 할양받았다. 이들이 다름 아닌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장관 대신등 친일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받은 각종 작위와 관직 그리고 할양받은 토지들에서 나오는 재물로 자식들은 해외로 유학을 보내서 대를 이어 부와 명예와 권력을 거머쥐었고, 그렇게 거머쥔 부와 명예와 권력은 광복 뒤에도 친일파에 대한 청산을 하지 못한 탓에 대부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안타깝게도 한국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구한말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가족과 문중의 영달을 꾀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한민족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선비들은 양반위주의 신분제가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하면서, 물려받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그 돈으로 만주에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전 재산을 기부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인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사업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기부하여 군자금을 모아 각종 무장투쟁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또 더 나아가 많은 청년들은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투신하여 독립군 단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당시 가장 체계적인 군사교육기관이던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사관생도로 모든 교육을 마친 뒤, 일본군의 장교가 되지 않고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자청하여 투신한 분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배워온 일본사관학교에서의 교재를 상기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를 펴냈고, 이를 숙달한 신흥무관학교의 생도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제대로된 현대식 군사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다.

 

나라는 망했으나, 한민족은 결코 망한나라를 탓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망한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열망으로 다시 뭉쳤고, 그런 열망들이 모여서 중국에 임시정부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 세웠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일본정부의 감시를 늘 받았고, 또 임시정부 내부에는 일본정부의 첩자들도 있었기에 하루 하루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오늘 하루 눈을 뜨면 살아서 하루를 맞는 것이고, 저녁에 눈을 감으면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어두운 밤이 되었다고 안심하고 눈을 붙일 수도 없었다. 언제 자객이 들어와 목숨을 빼앗아갈 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려운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1919년 3.1 독립선언이 있은지 불과 20여일 만인 1919년 4월 11일이었다.  평화적인 독립선언인 3.1독립선언을 계기로 국내외에 있던 많은 인사들이 당시 서양 국가들이 독립된 지역을 할양받은 조차지역이 많은 상하이가 가장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기에, 이곳에 모여들었고, 서양국가의 조차지역 중 프랑스 조차지역인 이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부터  시작되었으나 이후 일분군의 감시를 피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던 기간은 1919년 4월 11일 부터  1932년 까지이며, 그 중에서도 이곳 임시정부 청사에는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 까지 있었다. 이후 일본군경을 피하여 항저우[, 1932]· 전장[, 1935], 창사[, 1937], 광저우[, 1938], 류저우[, 1938], 치장[1939], 충칭[,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한민족의 광복운동을 펼쳤다. 


당시 가장 절망적인 순간까지도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잃었다고 자포자기 하지 않고, 또 그런 상황에서 국가경영을 잘못한 지도자를 원망하지만 않고, 자신들의 삶도 하루 하루 살아가기가 피곤하기 그지 없는 구차한 몸을 이끌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당히 살았던 위대한 선인들의 발자취를 잠시나마 밟아보니, 비록 사진속의 선인들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지금 세계적인 경제난으로 모두들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지만 망한 나라에는 살수조차 없어 머나문 이국 땅 서양사람들이 자리잡은 이곳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마련하고 광복을 꿈꾸던 선인들에 견주면 지금의 고통은 감히 입에 담지 못할 호사가 아닌가 싶어진다.

 

당시 임시정부에 몸과 마음을 투신하여 살았던  애국지사들은 삶의 현실에서 가장 치욕스럽게 들었던 말은 다름아닌 "망국민(亡國民)"이었다고 한다. 비록 현실이 어렵더라도 내나라가 있다면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비록 세계적 경제난으로 어렵다고 아우성이지만, 이제 당당히 독립하였고 또 열심히 노력하여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경제도약도 하였으니 망국민이라는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옛 선인들의 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래도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민으로 살고 있음이 못내 서글프기 그지 없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돌아보면서 세계인의 손까락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통일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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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