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진나들이

[화보]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청량당을 돌아보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한산성에 남아있는 유일한 장대(장수가 올라서서 명령ㆍ지휘하던 대)이다. 본래는 남한산성에 5개의 장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수어장대만 있다. 인조 2년 서장대라고 하여 1층으로 지었던 것을 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에 따라 2층으로 짓고 그 이름도 수어장대로 바꾸었다.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이 있는데 인조가 겪었던 8년 동안의 병자호란의 시련과 그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갔던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기며 잊지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별칭을 부여하였다. 이 무망루 현판은 영조가 쓴 친필로 현판은 보호각에 보관하고 있다. 


수어장대 바로 아래에는 청량당(淸凉堂)이란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조선왕조 시절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분을 축성책임을 맡았던 이회와 그의 처첩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당시 이회는 공사는 게을리 하면서 경비는 탕진한다는 모함을 받고 그만 억울하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회는 성벽을 쌓는데 최선을 다했고, 그의 처첩은 삼남으로 내려가 성벽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던 중, 남편 이회가 모함으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올 필요을 못느낀 이회의 처첩들은 한을 품은채 물속에 투신하여 죽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뒤 이회는 억울하게도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이회와 그의 처첩들의 억울함을 달래주기 위하여 이곳에 청령당을 짓고 그들의 넋을 달래는 도당굿을 해주었다.


이렇게 생긴 남한산성 도당굿은 남한산성의 축성과 그 백성들의 한과 역사를 담은 문화유산이 되었고, 더 나아가 민중들의 염원을  아우르는 성격으로도 승화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왕조시대를 살았던 가여운 사람들. 백성들은 가족이 몸과 마음을 바쳐 산성축조에 나섰건만, 그 공은 고사하고 억울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이 어디 이회와 그의 처첩뿐이었을까 싶다. 그러한 슬픈 사연은 어디 남한산성에서만 있었을까? 왕조시대 오로지 왕권을 중심으로한 사대부와 권력자들만을 위하여 존재했던 가여운 백성들의 삶이 느껴지는 청량당의 사연을 알고보니 백성으로 태어나 죽지 못해서 살았던 서민 선조들의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식민지시대도 겪으면서 모질게 살아온 한민족. 모진 독재시대를 거쳐 민주화가 된 오늘에도 안타깝게도 국민은 주인이 아닌 통치받는 피지배자일 뿐이다. 지금도 국민이 뽑아준 집권자가 큰 머슴이 아닌  마구잡이 주인행세를 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시대는 언제쯤 올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진정 국민이 주인인 시대를 학수고대 해본다. 그때는 아무래도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통치받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라는 올바른 주인의식이 바로 박힐 때쯤이 되지 않을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