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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장수의 의인 주논개(朱論介) 사당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성은 약하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갚아야 할 한이 있거나, 지켜야할 자식이 있다면  가녀린 나약함은 멀리가고 남성보다 더 강하게 변한다.  불굴의 정신을 지닌 여성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잔다르크를 꼽을 수 있다.  그녀의 힘으로 프랑스는 100년 전쟁에 영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와 못지 않은 인물을 한국에서 찾는다면  유관순을 비롯한 여자 의병장 윤희순 등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들 수 있다.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치욕의 임진왜란시절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조국을 위해 자신이 사랑한 남편의 원수를 갚기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면서 죽어간 여인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논개다. 그는 갔지만 그의 거룩한 생애를 추모하고자 그가 태어났던 곳에 혼을 모시고 추모하는 곳이 장수읍내에 있는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祠)다. 의암이란 그가 진주 남강에 뛰어들 때 왜장을 껴안고 뛰어내린 바위의 이름이고, 이를 그의 사당이름에 붙인 것이다.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는 그가 의롭게 죽은지 365년 만인 1955년 세워졌다. 300년이 넘도록 사당도 없이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과 그녀의 무덤만이 있었던 것을 1955년 그의 거룩한 뜻을 더욱 추모하고자 의암사를 세웠고, 이후 1974년 장수읍내가 잘 보이는 언덕에 그 규모를 키우고 격을 잘 갖추어 확장 이전하였다. 논개의 사당에는 영정이 모셔져있는데 처음에는 일본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던 초상화의 대가인 김은호 화백이 그렸으나, 그의 그림이 화법상 전통기법에 어긋나고, 그의 친일행적도 논란이 되어 김은호가 그렸던 초상화를 내리고, 대신 한국 전통초상화법에 맞게그린  윤여환화백 영정을 안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산화한 논개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자. 논개는 장수군 주촌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신안주씨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논개인 이유는 그녀가 태어난 사주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나 술(戌)자가 겹치는 것을 기이하게 여겨 딸을 술시에 낳은 것을 개를 놓은 것이라 해석하여 '개를 놓은 것'으로 여겼고, 이를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 곧  '논개'가 되므로 그렇게 이름 붙이면 좋을 것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논개기념관 설명 참조)


그런데 논개가 15세 되는 해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죽게 된 후 의지할 곳이 없자 논개와 어머니는 숙부인 주달무의 집에 의탁하였다.  그런데 주달무는 놀음으로 재산을 날리고, 조카인 논개를 부유한 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도망쳤다. 이 사실을 알게된 모녀는 부득이 외가로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 관아로 끌려오게 되었고, 이때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를 만나게 되었다.


최경회는 양측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보니 본시 소송의 죄는 논개를 팔고 달아난 주달무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논개는 피해자일 뿐 당사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려 그 피해자인 논개 모녀는 무죄석방하였다.  그러나 일가 친척없어 갈 곳이 없었던 논개 모녀는 무죄판결을 받고도 관아에 남아 잔심부름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최경회의 부인인 김씨로부터 틈틈이 공부도하면서 충,효,열에 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590년 최경회는 담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갑자기 죽은 부인 김씨의 뒤를 이어 논개는 최경회의 정식 부인으로 예를 올렸다. 그런데 혼례를 올린 그 해 최경회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모친의 묘소에 초막을 짓고 3년 상을 위하여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를 고향 장수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2년 뒤 임진왜란이 닥치자 최경회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전라도 의병장이 되어 장수일대에서 의병들을 모집하였고, 이때 논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최경회는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논개는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최의병장은 500여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무주 우지치 전투에서 대승을 이루고, 이후 경상도 일대 산음 지례 개령 성주 등을 누비며 승리를 하였다. 그런 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얻은 것은 최경회 등의 의병들이 합심하여 전투에 참여한 공로였다. 그 공로로 최경회는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아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논개는 한시 바삐 진주로 떠날 채비를 하였고, 논개는 남자로 분장하여 우여곡절 끝에  진주성에 들어와 최경회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진주성 외부에는 10만명의 왜병이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되갚기 위하여 몰려온다는 첩보를 접하고 그 대비책에 여념이 없었다. 1593년 6월 19일 왜적들은 드디어 진주성에 다달아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발어졌고, 11일간의 혈투끝에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된 후 최경회를 비롯한 김천일 고종후 등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4배를 한후 남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한편 논개는 최경회의 권유에 따라 전장을 피하여 외진 곳에 은신하였는데, 은신중에 최경회가 패하여 몸을 던져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논개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고 남편과 조선의 원수를 갚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한편 승리에 취한 왜병은 진주성 남강가 촉석루에서 승전 축하연회를 열기로 하고, 관아에 속한 기생들을 축하연에 불러 잔치를 벌이기로 하였다.  논개는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기생으로 분장하여 관기틈에 슬쩍 끼어 촉석루 축하연에 참가하였고, 잔치중 승리에 도취되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꼬여내 남강가 바위로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내린 진주 촉석루 아래 바위는 논개의 기상을 담은 바위라 의암(義巖)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렇게 얻은 바위의 이름이 논개의 사당의 이름이 되었다. 


지금 한국은 온통 최순실이라는 한 여인이 대통령을 꼬여 국정을 농단하고, 자신과 자신의 딸 그리고 일가 친척의 잇권을 위하여 재벌들로부터 무상으로 자금을 출연받고, 청와대 핵심관료들을 동원하여 비리를 밝히지 못하도록 검찰의 수사도 차 하였다는 것이 앙파껍질 처럼 끝도없이 밝혀지고 있다. 나라를 책임진다는 대통령이 국민으로 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지인의 친인척을 위하여 행사하고, 국가 안위를 다루는 중요 비밀문서를 사사로이 맺은 사람에게 수시로 빼돌리는 등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때  논개의 의로운 행적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할 일이 아닌가 싶다.


논  개



번영로  시

 거룩한 분노는
종교 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情)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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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