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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독립운동과 대장경 한글번역, 백용성스님의 생가를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가까워진 11월 덕유산이 품은 산골짜기 죽림정사를 찾았다. 불교에서 죽림정사는 남다른 뜻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혹독한 동토의 땅에서 설산수도를 거쳐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 그를 따르던 수도승단을 이끌고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수행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굴과 같은 곳에 머물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마을 집들을 돌아서 커다란 밥그릇(바루)에 탁발하여 받아온 음식으로 하루 한끼를 먹으면서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이런 열악한 시설에서 수도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깝게 여긴 당시 마가다국의 돈 많은 갑부인 수자타 장자는 그가 존경하는 부처님이 쾌적한 곳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에 최초의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는 전국을 뒤져 그런 곳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그가 택한 곳은 당시 왕의 아들이었던 기따태자가 소유하던 대나무가  숲에 사슴이 노니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수자타는 땅주인인 기따태자를 찾아가 그 숲을 자신에게 팔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그 땅값으로 얼마를 주면 팔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주인인 기따태자는 호기심이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땅을 사려거든 당신이 사고 싶은 땅의 넓이에 황금을 깔아주면 그만큼을 떼어서 팔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런 기따태자의 요구는 너무도 터무니 없는 것이었으나, 이는 기따태자가 수자타장자의 뜻을 알고자 시험삼아 한 말이었다. 그러나 수자타장자는 기따태자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두말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팔아서 황금으로 바꾸어 기따태자의 원림에 깔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것은 오히려 기따태자였다. 기따태자는 수자타장자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당신은 그 땅에 무엇을 하기 위하여 그 많은 황금을 아무런 이의 제기도 하지 않고 깔고 있는 것이오?.


그러자 수자타는 대답하였다. "내가 그 땅을 사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처음으로 부처가 되신 고타마 싯달타 부처님을 모시고 그분이 훌륭한 제자들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집을 지어드리기 위함입니다."고 하였다. 자신은 살아서 부처님을 만나고 모실 수 있는 것 만으로도 더이상의 영광이 없기에 전재산을 다 바쳐 부처님의 수행처를 마련 해 줄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말을 들은 기따태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역으로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그 땅을 그냥 제공할터이니 당신은 그곳에 집을 지으시오. 그러면 부처님을 위하여 나도 함께 하는것이 되지않겠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따태자의 땅에 수자타장자가 집을 지어 최초의 불교 종합 수도처인 절이 지어졌다. 그곳이 인도의 첫번째 가람이고 그 가람의 이름을 번역하면 죽림정사이다. 기자는 아직 인도에 가보지는 못했으나, 아마도 대나무로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듯 죽림정사는 최초의 가람으로 인도에 세워졌던 종합수도장이고, 그런 이유로 한국에도 많은 "죽림정사"들이 들어섰다. 그곳에 대나무가 있던 없던 부처님을 위하여 세웠던 최초의 절을 구현하고자 세운 절들이 모두 죽림정사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산골짜기로 유명한 장수군 계남면에는 덕유산을 의지하여 세워진 죽림정사가 있다.


이 절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삼일운동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기꺼이 서명하신 백용성스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장수 죽림정사는 이곳에서 태어나신 백용성스님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근래에 새롭게 지어진 절이지만, 그 뜻 만은 부처님을 위하여 세웠던 최초의 절 인도의 죽림정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백용성스님은 1864년 장수에서 태어나 해방되기 5년 전인 1940년에 돌아가신 한민족의 수난기를 굳세게 살아오신 선각자였다. 그는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참혹한 시기를 살면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고, 또 일제의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화하려는 음모에 굳세게 저항하여 한국불교의 변절을 막아내고자 쳐선을 다했다.


당시 일제강점기  불교마저 일본식 조동종에 예속화 시키고 대처승들로 왜색불교화 되어가려는데 크게 분발하고 전통불교를 지키고자 새로운 수행결사체를 만들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새로운 종단 대각회를 창시하고 그  수도장으로 서울 한복판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하여 이를 중심으로 기울어가는 시대에 한국 전통의 불교를 다시금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백용성스님은 1919년 한용운스님의 권유로 삼일운동에 민족의 대표로 당당히 서명하고 스스로 종로경찰서에 우리들이 민족을 대표하여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알아서 하라고 통보하였다. 그리고 떳떳이 잡혀들어가 심문과 고문을 거쳐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스님은 재판의 판결에 따라 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을 보냈는데, 그는 여기서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다. 당시 한국의 스님들은 모두가 한문으로된 불경을 뜻도 잘 모른채 읽고 외우는 실정이었는데, 형무소 다른 방에 투옥된 기독교 목사들은 서양말로 된 성경을 어느새 한글로 번역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서양의 찬송가를 번역하여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크게 깨우친 스님은 어려운 한자로 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뛰어들었고, 서양식 음악 곡조에 어울리는 찬불가도 직접 작사 작곡하여 신도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있어서 한국에서 1000년전에 만들어진 고려 팔만대장경이 다시금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된 것이다. 그는 금강경 원각경 화엄경등 많은 경전들을 설법하고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다. 한글이 창제될 당시 불경언해가 있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는데, 다시금 한글불경 역경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용성스님은 암울한 시대에 불법만 공부하고 제자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국내 함양땅 외진 곳에 황무지를 불하받아 개간하여 화과원 과수원을 만들어, 선농일체의 삶을 살았다. 그는 그 과수원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모아서 상해에 독립자금으로 제공하였고, 그런 활동은 국내에서의 활동뿐 아니라, 만주지역에도 펼쳐 만주벌판 광활한 땅 중국 길림성 안도현 명월촌과 봉령촌에 대규모 대각교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동포들이 살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나온 수익금도 기꺼이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런 공로는 해방된 후 인정받아 1962년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고, 이어 1990년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리고 1992년 중국의 역사상 제11대 명인에 추대되는 영광도 받았다.


이런 훌륭한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장수군은 그가 태어났던 곳을 정비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주변의 토지를 사들여 부처님 당시 최초의 사원이었던 이름을 따 죽림정사를 지었다. 이렇게 세워진 죽림정사는 대웅전과 용성교육관 용성기념관 범종루그리고 요사채와 그가 태어났던 곳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나, 그런 그의 행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 기자가 찾아간 날에는 떨어진 은행잎만이 뜰에 나뒹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너무도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불행한 시대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한민족의 미래를 다시금 세울 수 있도록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준 큰스님 용성진종대종사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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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