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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스리랑카 최고사찰 캔디 불치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도를 이루어 생겨난 불교는 인도에서 힌두교와 경쟁하며 성장하고 번성하며 세를 얻어갔다. 그런 불교는 인도를 벗어나 외국으로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최초의 전파지는 다름 아닌 인도의 아래 작은 섬 스리랑카였다.


부처님 입멸후 300년 뒤 인도대륙은 마우리아왕조의 통일 대왕이었던 아쇼카왕이 인도대륙을 통일하였다. 여러 수십개의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졌던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은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고, 그 전쟁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살생으로 인간적 고민과 갈등을 하였다. 


그런 고민속에 부처님의 유적을 발굴하고 그 유적속에서 부처님이 예언한 자신의 현재 모습이 부처님과의 전생인연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현생 모습은 부처님 당시 자신의 과거생에 모래로 지은 밥을 부처님께 바쳤던 선한 인연으로 오늘날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예언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전생과 현생의 인연을 알게된 아쇼카왕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도 씻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하였고, 자신이 믿게 된 불교를 인도의 전역에 전파하였으며, 자신의 뜻을 받드는 아들을 출가시켜 그 불교를 스리랑카에도 전파하였다.


이렇게 불교는 인도를 벗어나 외국으로도 전파되었고, 그 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많은 탑들이 스리랑카에도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부처님의 사리중에서도 이곳 불치사에 모셔진 치아사리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사리로, 스리랑카의 역사와 함께 하는 보물 가운데 보물로 여겨진다.


스리랑카가 근세 서구의 침략을 받아(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에 이르는 500여년) 수많은 불교유적들이 파손되고 탄압을 받으면서도 이들은 현재 이곳 불치사에 모셔진 치아사리의 영험력을 믿으면서 그동안의 국란을 극복했다고 한다.


이를 알아챈 외세들은 그 치아사리를 없애버리려고 하였고, 스리랑카인들은 이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밀의 장소들로 옮기면서 온전히 살아남아 지금의 캔디 불치사에 모셔지게 되었다. 부처님의 영험력으로 국란을 국복하겠다는 믿음의 스리랑카를 보면서 한국의 고려시대가 생각 났다.


한때 한국의 국란 극복과정에서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을 받게되자, 당시 고려인들은 신라시대 지어진 경주 황룡사의 9충탑에 모셔진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고려 초조대장경에 의지하여 몽골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무자비한 몽골의 침략에 맞서싸웠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몽골족은 경주로 내려가 황룡사9층탑을 불사르고 대구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초조팔만대장경판도 불태워 버렸다. 고려인들의 저항정신에 더 이상 부처님의 가피가 없어졌다는 좌절감을 심어주고자...


그러나, 고려인들은 그 난국속에서도 강화도로 천도하여 또 불타버린 초조팔만대장경을 더 보완하여 다시 팔만대장경 만들었으니, 그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모셔진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다.


스리랑카 캔디 불치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의 중요성과 이를 그 어느 보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스리랑카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팔만대장경은 얼마나 중요하게 대접받고 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치아사리가 모셔진 방은 아무도 들어갈 수 조차 없으며, 그 방문 앞에서 참배조차 일반인은 금지되었고 오로지 스님들만 가능하다. 치아사리가 모셔진 방 앞, 5m 정도 거리에 마련된 제단 앞에는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연꽃을 사다가 바치고 있었고, 이 언저리에서 정성스런 기도를 하며 언제까지나 주저 앉아 자리를 뜨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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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