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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구례 연곡사의 보물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연곡사는 백제성왕 2년인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연기조사는 화엄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연곡사를 창건하기 전 연기조사가 왔을 때 이곳은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에 제비들이 물장구를 치면서 노는 것을 보고, 그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면서 절 이름을 연곡사라고 붙였다고 한다.


백제를 거친 이후 통일신라 말에는 고승인 도선국사와 현각대사가 주석하며 연곡사의 사세를 떨쳤다. 이런 역사의 자취는 절 안에 있는 승탑들과 탑비들이 남아서 증명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시대를 지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억불의 오랜 시대를 지나며 차츰 사세가 약해지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절 안에 모든 전각들이 완전히 소실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는 한국내 대부분의 절들과 마찬가지로, 승병으로 대항했던 근거지였던 연곡사도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완전히 불살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연곡사에는 소요대사가 스님들을 모아 대대적으로 자체 중창불사를 진행하였고, 선승 400여 스님들이 선풍을 날리며 불학과 선학 그리고 염불을 갖춘 종합 수도장인 총림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차츰 기울어가는 조선왕조에 근근히 이어오던 불교의 맥 마져 1907년 항일의병들의 소굴이라 낙인찍혀 대대적인 의병 소탕작전에 의병장 고광순의 순절과 함께 모든 전각이 다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스님들은 다시 움막같은 거처를 마련하여 불교의 맥을 근근히 이어갔다. 하지만 한민족의 수난과 불교의 수난이 이로서 끝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고 광복이 되자마자, 남북은 사상적 이념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지리산은 좌익 게릴라들인 빨지산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터진 한국전쟁 중에 연곡사는 그나마 근근히 이어오던 불교의 전각들이 또 다시 전소되고 말았다.


너무도 처절한 역사속의 연곡사를 생각하니, 우리가 지금 보는 연곡사의 봄빛과 아름다운 전각들과 온전히 보존된 승탑들이 더욱 더 뜻 깊게 느껴졌다. 3기의 승탑들을 돌아보며 그 온전한 모습에 감탄을 하면서도, 스님들의 행적을 기록했던 탑신이 사라져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던 아쉬움도 지금의 탑머리와 기단(이수와 귀부)만이라도 이렇게 온전한 것이 감사할 뿐이다.


연곡사 경내에는 국보와 보불로 지정된 3고승의 사리탑이 있다. 그 탑들은 전체적으로 8각형 평면에 기단과 탑신 그리고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각각의 승탑들에는 기단부터 옥개석 까지 아주 섬세한 조각들로 빼곡하였다. 이는 한국에 있는 많은 스님들의 승탑에서도 쉽게 보지 못할 명품으로 그만큼 스님들의 덕과 행적이 위대했음을 뜻한다 할 것이다.


스님들의 승탑을 '부도'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라 하여, 요즈음에는 '부도'라 부르기 보다는 '승탑'이라고 부른다. 승탑을 세워주는 스님들은 당대 가장 훌륭한 스님들로, 부처님에 버금가는 깨달음을 체득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고승들이며, 그 당시 존경의 정도에 따라 승탑들의 규모와 장식이 차이가 났다. 


그런데 연곡사에 세워진 승탑들은 3기의 보물 승탑들이 하나같이 대단한 명품들 이었다. 지금의 후세들은 오래된 조각상의 모습에만 매혹되어 둘러보는 승탑이지만, 그 분들이 생전하였을 때에는 그들의 광명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그만큼 가신이의 행적이 그리웠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승탑의 주인공들에 대한 행적을 기록했던 탑비가 바로 옆에 있건만, 정작 행적을 기록한 탑신은 어디론지 가버리고 탑비의 기단과 옥개석인 귀부(龜趺)와 이수(首)만이 섬세한 조각상으로 남아있었다. 이 또한 크게 손상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스럽다는 생각으로 둘러본 연곡사의 석조 보물들이었다.  탑비를 없애버린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 유학을 숭상하던 유생들의 만행이 아니었나 싶어 진다. 종교가 다르면 다른 종교의 좋은 점을 본받기 보다는 좋은 것도 없애버리려는 마음이 드는가 싶다.


지금의 연곡사내 전각들은 대부분 근년에 다시 신축한 건물들이지만 그래도 그 뿌리가 1500년이 되는 유서깊은 연원을 간직한 귀한 절임을 탐방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지리산 근처에 많은 절들이 있고, 근처에는 화엄사 천은사 등 큰 절이 있지만, 연곡사 또한 이에 못지 않다.  새롭게 들어서는 전각들과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새사천왕문이 언듯 낮설기도 하지만, 짓고 머물고 무너지고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세상살이의 이치속에 이제 그 무너져 없어진 자리에 또 다시 인간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옛 선인들의 자취를 살펴보며 연곡사를 나왔다.


새봄을 맞이하는 연곡사와 피아골 계곡의 물소리는 어제와 아침에 내린 비로 인하여 요란하였다. 그리고 피어나는 매화, 생각나무, 진달래, 그리고 벚꽃까지 어우러진 지리산의 모습이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여유로웠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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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