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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정읍에서 만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는 무성서원이 있다. 무성서원은 신라 후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고운 최치원이 이곳 정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던 인연으로 이곳 사람들이 그의 선정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하여 세운 최치원의 사당 '태산사'를 짓고 위패를 모시고 그의 학문을 그리며 유학을 공부하는 도장으로 세운 서원이다.


최치원을 모신 사당이 '태산사'라 이름한 것은 이곳의 옛 지명이 '태산현'이었기 때문인데 이곳 사랃들은 옛부터 '태산사'라는 사당을 짓고 그의 선정에 감사하며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후 전국의 각지역에 유학의 큰 스승을 모시고 그 지역의 사립학문의 전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곳 사람들이 그를 모신 사당 태산사를 중심공간으로 하여 최치원을 이곳 유학의 종조로 모시고자 하여 세워진 서원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은 1544년 퇴락한 옛 '태산사' 사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고운 최치원 외에 이곳에서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을 함께 모셨으며, 이 외에도 정극인, 송세림, 정언증, 감약묵, 김관을 함께 모시었다.


무성서원은  그 규모는 크리 크지 않아 아담한 편이며, 서원의 권위를 높이고자 숙종으로부터 직접 헌판에 붓글씨를 받은 사악서원이 되었다. 그런 권위때문에 고종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옛 지명의 변천사를 보는 듯 태산현, → 태인현, → 정읍현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최치원의 희망과 좌절도 함께 느껴본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자신이 태어난 조국 신라를 당나라 보다도 더 좋은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기꺼이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를 골품신분제 로 꽁꽁묶인 사회가 아닌 능력위주의 사회로 개조하고자 신라의 골품제도개선을 위하여 여러차례 왕실에 건의문을 올렸으나, 번번이 거절되어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신라왕조에 대한 개조의 뜻을 포기하고 지방 현감을 떠돌다가 지리산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최치원의 행적은 그렇게 끝이났으나  최치원을 중심배향인물로 한 무성서원을 만나고 보니, 오늘 이 시대에는 무엇이 우리사회에서 시급히 타파해야할 적폐인지 문득 생각해 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학맥 인맥 권맥의 사슬을 부인하지 못하는 사회가 아닌가를 ...


최치원은  전해내려오는 한민족의 사상을 깊이 탐구하여 한민족의 옛사상이 당을 비롯한 외래사상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설파하였다. 그는 신라후기 '난랑'이라는 화랑의 행적을 기록하는 비석에 글을 짓는 가운데 한민족의 전해내려오는 풍류사상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가 지은 '난랑비서문'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의 시원은 〈선사〉라는 책에 자세히 실려있는데 여기에는 풍류도는 3교(유 불 선)을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집에 들면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으며, 무위에 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 행하라 함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도다"


'풍류'라는 말이 왜국되어 경치 좋은 곳에가서 춤추며 먹고 노는 것을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시대에 깊이 되돌아 보아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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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