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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동학혁명의 최후 전적지 공주 우금치 유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894년 고종 31년 충남 공주시 금학동과 주미둥에 걸쳐 자리잡은 우금치 고개에서는 죽창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우금치 전투가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필연은 조선정부의 부패와 무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정부는 부패와 무능을 스스로 개혁할 기회를 상실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어났던 1차 동학농민군과 전주에서 화약(1894년 5월 8일)을 맺어 한 때 나마 전라 경상 충청지역에서는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행정을 실현하며 평화로운 시대가 되는 듯 하였다.  집강소에서는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지방관의 도움을 받아 실천하는 등 농민과 지방관청의 민주적 협조행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때 실시한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로 화해하여 공동으로 서민정책에 협력한다.

둘째, 탐관오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한다.

셋째, 횡포한 부자들을 엄중히 처벌한다.

넷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처벌한다..

다섯째,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

여섯째, 천민 차별하는 정책을 폐지하고 백성들의 머리에 쓰는 평양립을 혜지한다.

일곱째, 청상과부의 재가를 허용한다.

여덟째,부당한 각종 세금을 철폐하고 농민이 진 빚을 탕감한다 .

아홉째, 관리채용에 차별을 없애고 인재를 등용한다.

열째, 일본과 상통하는 자를 엄벌한다.

열한째, 공사채를 막론하고 농민의 빚을 탕감한다.

열두째,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하여 경작한다.

지금 실천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개혁안들 있었다.


이러한 지방정부와 동학농민군간의 합의에 대하여 중앙정부는 동학농민군들에 굴복한 것으로 판단하여 못마땅하게 여겨 어떻게든 동학농민군 위주의 개혁안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을 찾게 되었고, 조선정부 자체적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청나라에 동학군 진압을 위한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조선땅에 발을 내딪자 파병요청을 받지도 않은 일본은 청나라와 맺은 텐진조약을 내세우며  조선내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일본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한 꼴이었다.


이렇게 들어온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난입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조선정부에 친일내각을 만든 뒤, 6월 23일 청나라 군을 상대로 선전포고 하여 단시일에 청군을 몰아내고, 조선을 집어 삼키려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돌변하자 일본군의 포악상에 조선정부의 자체개혁을 믿고 흩어졌던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고 봉기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는 전봉준과 충청도에서는 손병희가 주축이 되어 전라도 충청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조선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무참히 패하여 사실상 동학농민전쟁의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전투가 바로 우금치 전투다.


우금치전투는 추위가 몰려오는 11월  9일부터 11월 12일까지 4일간의 전투로, 죽음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동학군은 우금치 고개에서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죽어가 쌓인 시체가 골짜기를 메워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때 죽어간 동학농민군의 시체는 그 수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 시체들은 근처 산야 여러곳에 무더기로 묻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이 얼마나 죽었으며 그 주검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정확한 조사조차 되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주검은 10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120여년의 세월이 흘러, 당시에는 무참한 죽음으로 실패로 끝나 오랫동안 동학난으로 불리우던 동학혁명은 이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재평가되어  당당히 동학혁명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백성이 곧 주인임을 일깨운 위대한 사상으로 자리매김도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가 치러지던 우금치의 현장은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하였다. 한국민주주의 성지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이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는 그 역사성을 느낄 수 있는 제대로된 조형물 하나 보이지 않았고, 무참히 죽어간 동학혁명군들에 대해 넋을 위로하고 묵념조차 할 수 있는 추모시설도 없었다.  지금 서있는 어설픈 위령탑은 1973년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도들의 모금과 구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금일봉으로 세워지게 되었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국의 크고 작은 역사의 현장에는 그 의미에 부합하는 기념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그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념관이 지어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도록 각종 유물과 설명자료를 만들어 탐방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우금치고개마루 현장에는 동학혁명군의 비참한 최후에 대하여는 그 초라함과 무관심에 분노마져 느껴졌다.


기자는 너무도 아쉬워 근처를 배회하다 우금치 고개 아래에 있는 원효사라는 작은절을 찾았다. 그리고 원효사 주지스님과 우금치전투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자신도 우금치의 전투에 산화한 동학농민군들이 너무도 안타까와 자비를 들여 2차례에 걸쳐 천도재를 지냈다며, 앞으로 충남과 공주시가 우금치의 성역화에 앞장설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이런 말을 듣고 돌아서는 기자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우금치 동학혁명최후전적지가 재평가되어 국난극복에 투신해 죽어간 영령들이 더이상 원혼으로 남지 않게되기를 빌며 고개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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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