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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옷감으로 된 마패, 부험(符驗)

수장고 속 왕실유물 이야기 7월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이하여 이번 달에는 특별히 고려와 중국 명나라와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소장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수장고 속 왕실유물 이야기” 7월의 주인공은 중국 명나라 황제가 공적인 목적으로 출장을 오는 고려의 관원을 위해 발급한 ‘옷감으로 된 마패(馬牌)’로 ‘부험(符驗)’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유물입니다.

 

 

비단 바탕에 두 마리 말[馬]과 황제의 명령을 직조(織造)해 넣은 횡권(橫卷)의 두루마리 형태 마패로 우리에게 익숙한 원형의 금속 재질의 마패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중국 명나라 홍무 23년, 곧 고려 시대인 1390년(공양왕 2년)에 만든 것으로 명 태조가 자국 영토에 도착한 고려 사신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발급한 공적인 증빙 신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험의 형태와 황제의 명령

 

직물 마패, 부험은 어떤 성격의 유물인지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부험의 형태는 꽃무늬가 있는 황색 비단에 장황(조선시대 써왔던 말로 표구는 일본서 들어온 표구란 말)하고 말아 보관하는 두루마리입니다. 화면 가운데는 무늬가 없는 비단 바탕이며 네 변에는 용(龍)과 구름무늬를 수놓아 둘렀습니다.

 

①용과 운문 테두리 안쪽에는 오른쪽부터 “皇帝聖旨 公差人員 經過驛分 持此符驗 方許應付馬疋 如無此符 擅便給驛 各驛官吏 不行執法 循情應付者 俱各治以重罪 宜令準此”라는 황제의 명령을 붓글씨가 아닌 비단 바탕을 짤 때 직조(織造)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풀이하면 “황제의 명령이다. 공무로 가는 사람이 역(驛)을 지나 갈 때 부험을 지니고 있으면 주어야 할 말[馬]을 주도록 허락하고, 만약 이 부험이 없는데도 멋대로 역말을 지급하거나 각 역의 관리로서 법대로 행하지 않고 인정에 따라 말을 주는 자는 모두 중죄로 다스리도록 하니, 마땅히 이를 따르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②그리고 가운데에는 안장을 갖춘 두 마리의 말을, ③왼편에는 “洪武二十三年月日” 곧 ”홍무(洪武) 23년 월 일“이라는 만든 때를 수놓았습니다. 제작시기의 왼쪽 편에 가는 글씨로 일련번호인 “達字參拾號”를 붓글씨로 썼고, 날인의 상태가 흐릿하여 판독이 어려우나 제고지보(制誥之寶, 옥새)를 찍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④그리고 왼편에 작은 옥새(玉璽)가 절반만 날인되었고, 그 위에는 일련번호인 “達字參拾號”가 절반만 붓글씨로 쓰여 있습니다. 이는 역참에서 관원이 제시한 부험과 맞춰서 제짝이 맞는지 확인하여 역마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열하일기》의 황명마패(皇明馬牌)

 

위 부험과 관련하여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황명마패(皇明馬牌)'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서원(尙瑞院, 옥새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상징하는 각종 물건들을 관리하던 관청)에 보관되어 있는 명(明)의 마패(馬牌)는 짙은 누런 빛 무늬 없는 비단에 오목(烏木, 단단하고 검은 빛을 띤 나무)을 축(軸)으로 한 두루마리다. 길이는 두 자 네 치요, 넓이는 다섯 치 남짓하고, 가장자리에는 이룡(螭龍, 전설상의 동물로 뿔이 없는 용)을 수놓은 복판에 안장을 갖춘 붉은 말 한 필이 놓여 있다.

 

황제의 지시문(指示文)이 있는데, “공무로 가는 인원이 역을 통과하는 데는 이걸 나누어 가지고 가서 맞추어 본 다음에야 마필의 제공을 허락한다. 만일 이것을 맞추지 않고 함부로 역말을 준다든가, 법대로 집행하지 않고 정실에 따라 수응한 자는 함께 중죄로 다스릴 것이니, 마땅히 이 명령을 지킬지어다. 홍무(洪武) 23년(1390년) 월 일.”이라 하였다.

 

글자는 모두 검정 실로 수를 놓았고, 연호(年號) 위에는 옥새(玉璽)를 찍었다. 그 새문(璽文), 도장에 새긴 글씨)에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 하였다. 그리고 왼편에는 ‘통자칠십호(通字七十號)’라고 가는 글씨로 썼으며, 아래쪽 연폭(聯幅)에는 작은 옥새의 절반을 찍었다. 또 붉은 말 한 필을 그린 축(軸)에는 ‘통자육십칠호(通字六十七號)’라 하였고, 푸른 말 한 필을 그린 축은 ‘통자육십팔호(通字六十八號)’였고, 또 붉은 말 두 필을 그린 축은 ‘달자삼십호(達字三十號)’라 쓰여 있다. 대체로 홍무(洪武) 경오년(1390년)에 군산도(群山島)를 거쳐서 배가 출발하여 금릉(金陵)으로 조회할 때에 내린 마패의 네 종류이다…(후략).

 

                                                     박지원, 《열하일기》 중 황조마패(皇明馬牌) '皇朝馬牌’

 

《열하일기》 속 ‘황명마패’에 대한 묘사와 이 유물의 형태와 내용이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궁중 전래품으로 전해지면서 유물의 상태가 좋지 않지만, 《열하일기》를 통해 유물에 찍힌 인장은 제고지보, 또 달자삼심호(達字三十號)라고 일련번호가 적힌 이 유물에 표현된 두 마리의 말은 본래 붉은 색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험의 보관과 전승

 

《열하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부험은 조선시대 새보(璽寶), 부신(符信) 등을 관리하던 상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11년(순조 11년)에 경봉각으로 이봉되었다는 아래 기록이 있습니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어제 상서원(尙瑞院) 낭관(郞官)의 평소에 품은 뜻으로 인하여 명(明)나라 조정에서 내려준 수부험(繡符驗)을 옮겨 보관하는 것이 합당한가의 여부를 의정부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셨습니다. 명나라에서 옛날에 하사한 물건으로는 오직 이 한 조각의 수문뿐이니(惟此一片繡文), 받들어 간직하는 도리는 더욱 특별하게 해야 하는데, 본원(本院)에 위임하여 다른 마패 등과 뒤섞어 더러운 먼지 속에다 버려두었으니 참으로 온당치 못합니다. 경봉각(敬奉閣)의 명나라 구적(舊蹟,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봉안해 둔 곳에 옮기고 예조 당상 및 본원(本院)의 우두머리가 날을 가려서 쌓아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순조실록》 14권, 1811년(순조 11년) 4월 18일 기사

 

위 기록으로 보아 1811년 당시 상서원에 수부험(繡符驗)은 한 조각만 남아있으며, 다른 부패(符牌)와 달리 명에서 내려준 것이므로 명나라 구적을 모시는 경봉각으로 옮겨 보관하도록 주청하여 옮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부험(창덕 27445)은 창덕궁에서 옮겨온 것이므로 순조 때 경봉각으로 이봉되었던 “한 조각의 부험”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추정하지만 이봉된 부험에 몇 마리의 말이 수놓인 것인지 묵서된 일련번호가 몇 번인지 상세한 기록은 없어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다른 한 점의 부험(덕수 1784)이 소장되어 있어, 실록에 기록된 부험이 현존하는 두 부험 중 어떤 것인지, 정말 한 점만 상서원에 전해졌던 것인지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역시 홍무 23년에 발급된 것이나 말이 한 마리인 점, 묵서된 일련번호가 ‘통자육십팔호(通字陸拾捌號)’인 점이 다릅니다. 1909년 제실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서 구입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유물의 상태는 우리 박물관에 소장 중인 부험보다 온전하고 훨씬 좋은 상태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의 구 유물대장 사진을 보면 창덕궁에 보관되던 때부터 축과 장황 비단부분이 분리되고 얼룩도 상당히 심해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3년 한 차례 보존처리가 가해져 없어진 부분을 채우고 새로운 축으로 새로 꾸몄지만 얼룩과 변색 등은 여전히 남아 있어 60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대명외교의 상징물

 

부험은 중국 명나라에 사행을 오는 고려 사신이 역마를 이용할 수 있도록 발급한 것이나 별도의 유효기간 없이 대명외교가 활발히 이뤄진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사신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한 나라의 사행을 위해 황제가 내린 문서이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 외교 상징물입니다. 사행을 가는 길에 천재지변으로 소실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개인의 실수로 분실할 경우 책임자를 엄벌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절일사(節日使, 중국 임금의 생일에 보내는 사신)인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박연(朴堧)이 처음에 회동관(會同館)을 출발할 때 부험(符驗)을 잃었던 것을 찾았는데 박연이 통사 김자안(金自安)을 시켜 달려 들어가서 찾아 왔다. 보고할 적에 박연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으나, 서장관(書狀官) 김중량(金重良)이 아뢰니, 임금이 의정부에 이르기를, "지금의 이 부험(符驗)은 중국에서 내려 준 것이므로 결코 가볍지 않다. 만일 잃어버렸다면 사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누(累)를 끼침도 또한 컸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박연의 벼슬을 빼앗고, 종사관(從事官)에게도 죄를 차등 있게 주었다.

 

《세종실록》 111권, 1446년(세종 28년) 1월 28일

 

이처럼 직물 마패 부험은 중국 명나라 황제의 명의로 발급된 문서로 사행에서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증표로서 기능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거쳐 명나라와의 정치 외교와 관련한 귀중한 유물로 중요하게 다루고 보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보라(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