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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서울역사편찬원, ‘6․25전쟁이 바꾼 서울’ 연구서 펴내

주제별 7개 논문 통해 6․25전쟁이 서울의 사회변동에 미친 영향 규명
서울 소재 공공도서관에 무상 배포, 시민청 서울책방에서 구매 가능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 6․25전쟁은 세계의 냉전이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의 열전으로 폭발한 중대사였고, 그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만큼 남북한 사회는 급격한 변동을 경험했다. 조선시대부터 모든 변화의 중심지였던 수도 서울은 전쟁 당시와 전후에 나타난 남한의 사회변동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서울역사편찬원(원장 김우철)은 6․25전쟁이 1950년대 서울의 사회변동에 미친 영향을 주제별로 조명하는 연구서 《6․25전쟁과 1950년대 서울의 사회변동》을 펴냈다. 전쟁 기간 북한의 서울시 점령정책, 환도 논의와 시도가 지닌 정치적 의미, 전후 도로ㆍ교량의 재건과 시민의 역할,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의 전개, 구호물자 도입에 따른 서울사람들의 식생활의 변화, 전쟁고아와 부랑아의 발생과 정부 대책, 용산 미군기지의 설치와 이에 따른 용산 지역의 변화를 다룬 모두 7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교량ㆍ도로의 재건: 시민들의 불편과 부담, 역할과 의지를 발판으로 이룩된 전후 도시복구사업

 

 

 

정부와 서울시는 1954년부터 도로 복구와 보수에 나섰고, 도로 신설 계획도 마련했다. 대규모 도로 건설에 원조 자금을 배정하고, 보수 자재의 자체 충당을 위해 서울에 아스팔트 공장도 세웠다. 정부는 도로 보수와 신설을 위한 예산 일부를 시민들의 보조금과 차량 소유주의 도로손상부담금으로 충당코자 했다. 시민들은 국민반 단위로 도로 보수에 나서야 했다. 시민 부담은 도로 확장으로 인한 주택 철거로도 가중됐다. 시민들은 인도교 복구 과정에서도 정부의 무책임한 자세로 인해 위험과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1950년대에는 여론과 정계 일부에서 전쟁 피해가 시민들에게 가중되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를 해소할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건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점차 개발논리에 묻히면서 무허가주택의 불법성이 강조되고 강제철거는 합법의 틀로 정당화됐다. 도로와 교량이 복구되고 확장되면서 서울 시민들은 재건된 서울을 경험했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 서울 재건을 담당하는 주체로 살아갔다. 이처럼 1950년대 서울의 재건은 가시화된 도시 복구사업의 성과와 함께 시민들의 역할과 의지로 가능할 수 있었다.

 

환도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 정치적으로 ‘활용’된 환도 논의와 시도

 

전쟁 동안 수도 서울로의 환도 시도와 이를 둘러싼 논의인 ‘환도설’은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달리하며 여러 차례 전개됐다. 정부와 수도의 북상(北上)을 의미하는 환도는 이승만 정부에겐 북진(北進)의 또 다른 표현이었고, 북진 통일과 휴전 반대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정치적으로 활용됐다. 이 와중에 환도에 앞서 이뤄져야 할 서울의 재건과 서울 시민에 대한 구호 및 귀환 대책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환도설’에 따라 주택 값과 물가가 폭등하여 잔류 시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환도설로 이승만 정부는 시민의 생활을 고려하기보다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명분을 가시화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이 됐다.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의 전개: 난민정착사업은 정부의 핵심 구호사업, 그러나 실제 여러 문제 발생

 

 

 

 

서울시와 미국 원조기구는 시민의 구호와 정착, 주택난 해소와 ‘자활’을 표방하며 난민정착사업을 실시했지만 실제 사업의 진행과정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난민정착사업은 1950년대 정부의 핵심 구호사업이었다. 특히 미아리사업장은 피난민, 상이군인, 이재민, 철거민 등 생활 기반이 취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획됐다. 그러나 그 구성원이 사무직, 영세상인, 임대인 등으로 바뀌었고 공동사업장도 실패로 귀결됐다. 사업장 부지 제공과 관리에 있어서 비리가 만연했으며, 정착지의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철거가 이뤄지고 또 다시 난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식생활의 변화: 구호물자 탓에 달라진 요리환경, 요리주체들이 전통 재현과 개선, 두 방향으로 대응

 

6․25전쟁 후 밀가루ㆍ설탕ㆍ우유 같은 구호물자의 대량유입으로 요리환경이 달라졌다. 요리주체(가정ㆍ가게에서 요리하는 사람)들도 일제 강점 이전부터 거주하던 서울토박이, 일제 때 서울로 이주한 지방민,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 나라밖에서 돌아온 귀환민, 1950년대 중반 이후 상경한 이농민 등으로 다양해졌다.

 

변화된 요리환경 속에서 다양한 요리주체들은 두 갈래로 요리법을 개발하고 발달시켰다. 한편에선 전통 식생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개량해서 서양식 외래 요리법으로 바꾸려 했다. 그들은 전통 개선을 목표로 요리법을 개발하고 보급했다. 다른 한편에선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며 낯선 구호물자로 익숙한 맛을 구현하려는 요리주체가 있었다. 그들은 구호물자를 가지고 전통 맛을 재현하는 요리법을 개발ㆍ보급했다.

 

 

서울시민들은 학교와 요리강습회에서 전통개선에 입각한 요리법과 미각을 배웠고, 가정과 대중식당에서 전통음식을 찾았다. 또 일상적으로 식사할 때에는 전통음식을 먹지만, 소풍이나 데이트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서구적 외래음식을 찾았다.

 

구호물자 소비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고추나 마늘 같은 매운 양념과 ‘맛난이’라 부르는 인공조미료 소비도 늘어났다. 요리법이 양 방향으로 발달되면서 구호물자는 서울시민의 식생활에 안착됐다.

 

6․25전쟁의 충격 속에서 서울은 다양한 요리법이 만나는 중심지가 됐다. 요리주체가 다채로운 만큼 요리법도 다양해졌고, 새로운 음식들이 전통 혹은 개선이란 이름으로 ‘발명’됐다. 서울은 전통 재현과 개선이라는 두 방향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롭고 다양한 근대적 요리법이 발명되는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고아와 부랑아 대책과 현실: 시설 보호와 탈출, 과잉 검거와 처벌의 대상

 

 

 

 

전후 수많은 전쟁고아와 부랑아를 구호하기 위한 외국의 원조와 시설이 증가했고, 한국 정부와 사회도 보호소나 직업학교를 설립해 이들을 수용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수용시설의 부족과 열악한 수용시설의 환경 때문에 시설에서 탈출하는 아이들이 속출하는 등 아이들은 여전히 가두를 방황하며 방치돼 있는 형편이었다. 빈곤과 사회혼란 속에서 방치된 아이들은 범죄에 노출되기 쉬웠다.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기보다는 일소해야 할 대상으로 보며 단속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거리의 전쟁고아ㆍ부랑아들은 우범자라는 이름으로 과잉 검거와 처벌의 대상이 되곤 했다.

 

북한의 서울시 점령정책: 조직 재건 추진과 좌익세력ㆍ북에서 내려온 자들이 권력 장악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서울에 북한체제를 이식하고자 계획하면서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고 일원화된 행정통치 체계와 당 조직을 구성했다. 토지개혁과 노동환경 개선을 추진했지만, 서울은 후방도시로 설정됐으므로 정책 목표와 그 실제 현실은 괴리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점령 기간 동안 서울 시민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우익세력에 대한 인민재판과 기존 권력관계의 변화였다. 과거의 엘리트는 ‘반동세력’이 됐고 좌익세력과 정치범들이 새로이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가, 이후에는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주도해 나갔다.

 

용산 미8군기지의 설치: 기지촌의 등장ㆍ번성과 PX 물품의 암시장 유통

 

전쟁 직후 미 제8군 사령부가 용산기지를 설치한 이래로 1957년에 유엔군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가 함께 운영되면서, 용산은 1950년대 후반 일본의 역할을 대체할 만한 군사전략적 가치를 지닌 곳이기도 했다. 즉, 용산은 동북아지역 내 미 지상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전쟁 이후 미군이 장기간 주둔하게 되자 용산 미군기지는 주변 지역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용산 주둔 미군들을 위한 기지촌이 생겨났고, 미군 주둔이 장기화되면서 기지촌은 점차 확산됐다. 특히 1957년 한국정부가 성병진료소를 미군기지 주변에 집중 설치하여 운영하면서 미군 당국이 미군의 외출과 외박을 허용하게 되자 기지촌은 급격히 번창하게 됐다.

 

또한 전쟁 이후 미군기지의 PX 물품이 기지촌을 통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서울 시내에 유통됐다.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PX 물품은 다종다양했으며 전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PX 물품은 당시 우리나라 산업 생태계를 교란시켜 국가경제의 어려움을 가중시킴에 따라 정부와 미군 당군은 지속적으로 이를 단속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6․25전쟁과 1950년대 서울의 사회변동》은 서울 소재 공공도서관 등에 무상으로 배포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구입을 원할 경우 신청사 시민청의 서울책방에서도 살 수 있다. 책값은 1만 원이다.

 

한편, 서울역사편찬원에서는 ‘서울 역사의 취약 분야’를 보강하고 서울 연구자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서울역사 중점연구’ 발간 사업을 2016년도부터 시작하였다. 2016년도 사업의 결과물은 2017년에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서울역사 중점연구총서 제1권)와 《일제강점기 경성부윤과 경성부회 연구》(제2권)로 발간한 바 있다. 이번에 발간하는 《6․25전쟁과 1950년대 서울의 사회변동》(제4권)은 2017년 사업의 두 번째 결과물이며, 첫 번째 결과물인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제3권)은 올해 상반기에 펴냈다.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다스림(治)으로 본 조선시대 성저십리》(가제)와 《조선시대 ‘경기’ 연구》(가제)를 서울역사 중점연구총서 제5,6권으로 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