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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친필본과 목판본이 함께 실린 <영조 어필>

수장고 속 왕실유물 이야기 8월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 왕실의 여러 임금의 어필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직접 쓴 글씨를 비롯해 목판본(木版本)이나 석판본(石板本) 글씨, 석판본을 인쇄하기 위해 돌에 새긴 석판의 원본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조어필은 특별하게 임금이 직접 쓴 원본과 이를 모사한 목판본 어필이 함께 실려 있는 어필첩(御筆帖)입니다. 첩의 앞쪽 6면에는 어필 진적(眞蹟)이, 뒤 4면에는 ‘선사지기(宣賜之記)’가 찍힌 모사(摹寫) 목판본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이 어필은 영조 임금이 재위 43년인 1767년 4월 8일에 부왕인 숙종의 어진이 모셔진 선원전을 봉심(奉審, 왕명을 받들어 능이나 종묘를 보살피던 일)한 뒤, 생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에 가서 전배례(展拜禮, 참배)를 행하고 초지(草紙)에 쓴 글입니다. 영조는 어필을 모사해 족자(簇子)로 만들어 1본은 임금에게, 1본은 세자에게 들이며, 입시한 여러 시신(侍臣,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과 시위처(侍衛處, 임금을 모셔 호위하는 관청)에도 내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족자본은 현재 확인되지 않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는 같은 해에 부총관(副摠管) 원중회(元重會)에게 내려진 ‘어제어필 내사(御製御筆 內賜)’라는 표제(表題)가 있는 동일 목판본이 전해져 옵니다. 시신과 시위처에는 목판본첩을 내려준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1면에는 ‘추모가 깊어, 여러 신하를 격려하다.[追慕深, 勉諸]臣’ 라고 글을 쓰게 된 까닭을 썼습니다. 이어 16자의 사언시를 씁니다. 2면에는 앞 구절 8자를, 3~4면에는 뒷 구절 8자를 썼습니다. 친필에는 목판본만 남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들이 보입니다. 2면 ‘降’은 한줄에 쓰고 ‘陟’은 줄을 달리하여 위로 올려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면에 7자를, 4면 한 면에 ‘君(영조 자신)’자만을 썼습니다. ‘体‘ 글자 옆에는 동그라미를 표시하여 원래 글자를 수정한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嗚呼陟降 오호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되풀이하는 혼령(魂靈)이시여

   眷顧弗肖 불초(不肖)를 돌보아 줌이시어

   吁嗟世臣 아아! 세신(世臣)들이여!

   弗体暮君 총명치 못한 임금을 본받지 마오

 

그리고 마지막에 5면에는 쓴 날짜를, 6면에는 쓴 까닭을 다시 한 번 썼습니다.

 

   신 나이 74살 초파일에, 절하고 공경히 씀. 소자(와 충자(세손)를 면려하고 또한 세신을 신칙한다.           臣年七十四歲燈夕, 拜手敬書, 勉小子冲子, 亦飭世臣.

 

 

영조는 마지막에 자신은 본받지 말라 하며 자책(自責)하는 뜻을 보이고 있으나 이는 당시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조는 즉위 뒤 탕평책을 펴서 노론과 소론의 정치세력 사이에 균형을 도모합니다. 영조는 때로 자신의 탕평책을 거스르며 당론을 주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파직시키거나, 영원히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거나, 유배 등에 처하기도 합니다.

 

영조 43년 3월 12일에 영조는 앞서 처벌된 서형수(徐逈修)ㆍ유당(柳戇) 등에 대해 사면합니다. 이는 이틀 전인 3월 10일에 행해졌던 왕비 친잠의 경사로 인한 조처였습니다.

 

한편 영조는 43년 1월에 송명흠 등 산림(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시골에서 지내는 선비)을 서인(庶人, 서민)으로 삼으라는 재위 40년에 취했던 자신의 명을 철회합니다. 이는 사도세자의 여동생인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3월 15일에 정언 유지양(柳知養)이 대신과 유신(儒臣, 유학자 신하)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고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의 말은 받아들였다고 영조를 비판하고 나섭니다. 이에 영조는 대노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4월 5일에 영의정 김치인이 서형수와 유당의 등용을 언급합니다. 영조는 이 같은 성급한 등용 요청에 매우 언짢았습니다.

 

이에 3일 뒤인 4월 8일에 부왕 숙종의 어진이 모셔진 선원전을 봉심할 때 이런 일련의 상황을 아룁니다. 선원전에서 아뢴 내용을 승지에게 쓰게 하여 세자에게 보내고 다시 이 같은 일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영조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당시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그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웅열(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