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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한국 첫 모전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 창건한 절로 고승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거쳐간 절이다. 원효대사는 분황사에서 출가하였으며, 화엄사상을 깊이 체득하여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화엄경을 해설한 화엄경소, 법신 비로자나불을 믿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 자신과 국가가 사천왕 등의 보호를 받 다는 금광명경을 해설한 금광명경소 등 많은 책을 지었다.

 

원효스님이 열반에 든 뒤에는 그의 아들인 설총(한국 유학자 중 성균관 문묘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원효대사의 조각상을 만들어 모셔두고 설총이 죽을 때까지 이곳 분황사에서 아버지인 원효스님을 공양하였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조상은 고려 후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있을 때까지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의 기록에 따르면, 분황사 금당전각의 벽에는 신라시대 신묘한 화가였던 솔거가 그린 관세음보살도가 있었다고 전하며, 경덕왕 14년(755년)에는 무게 30만근에 이르는 거대한 약사여래입상도 봉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번창하던 분황사는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와 함께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과거 분황사의 흔적은 경내를 둘러싼 담장 아래 널리 펼쳐진 주춧돌과 각종 석조 유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분황사에는 전탑처럼 생긴 석탑(모전석탑)이 3층의 모습으로 서있는데 경주의 역사를 기록한 <동경잡기>에 따르면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3층으로 높이는 9.3m이다.  이 석탑은 분황사가 창건될 당시인 선덕여왕 3(634년)년 건립되었다.  한국에는 모전석탑이 여럿 있으나, 분황사 모전석탑이 그 최초의 것이며 규모에 있어서도 가장 크다.

 

석탑의 재료는 분명히 돌이기에 석탑이라 하는 것인데, 분황사 모전석탑은 회흑색의 안산암을 마치 일정한 틀에 찍어낸 벽돌처럼 다듬어서 벽돌탑을 쌓듯이 쌓아 올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중국에서 유행하던 전탑을 모방하여 쌓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중국에는 크고 높은 전탑들이 다양하고 많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전탑모양을 돌로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어 쌓았고, 신라인들은 돌을 다듬어 벽돌처럼 만들어 쌓았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기단은 1단으로 한 변의 길이가 약 13m  정도의 정방형이며 기단높이는 1.0m 정도로 자연석을 다듬어 단을 쌓았다. 기단의 4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각각 배치하였는데, 그 모습이 모두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만든 것은 아마도 석수가 서로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자를 배치한 것은 맹수의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자는 불교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에 부처님을 의지하여 모두 지혜를 얻기를 바라는 뜻에서 배치한 것이다.  2마리는 목주변에 갈기가 무성한 숫사자, 2마리는 목주변에 갈기가 없는 암사자이다.  현재의 탑은 3층까지 남아있는데, 각층의 지붕은 낙수면이 석탑 밖으로 돌출하게 하면서 또한 층을 구분하고 있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체감하도록 하였다.

 

1층 탑신의 4면에는 가운데가 뚫어져 감실을 만들었고 그 앞에는 돌로 된 문을 달았으며, 돌문의 입구에는 인왕상을 배치하여 문지기 역할을 하게 하였다. 문을 들어서면 안쪽에 부처님을 안치였다. 4면에 각각 2인의 인왕상을 배치하여 인왕상은 모두 8인이며, 그 형상은 인왕상 특유의 근육질 몸매로 조각하여 역동적인 힘을 느껴지도록 하였다. 불탑은 그 어느 것이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부처님의 사리는 부처님 본체와 같은 것이고, 부처님은 세상에 없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불탑에 사리를 모시고, 탑돌이를 하고, 탑 앞에서 예를 갖추는 것은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분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1000년을 전해오다 임진왜란 때 허물어졌다고 한다. 이후 제대로 보수하지 못하여 본래 모습으로 복원되지 못하고, 자꾸만 허물어져가던 탑을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인 문화재 복원학자들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현재의 상태로 부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금도 경내에는 탑의 재료였던 석재들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한국 모전석탑 중 최초이며, 가장 규모가 큰 모전석탑이다. 이를 돌아보며 오랜 고난의 역사속에 흥망성쇠의 고뇌를 느끼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역사속에 과연 어떤 모습으로 전해질 것인지 염려해 본다. 지금은 비록 암자처럼 작은 절이지만 분황사가 창건된 때에는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주요 불전(문-탑-금당-강당)을 중심으로 회랑이 감싼 큰 절이었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분황사 규모는 경내 너비는 동서가 138m에 이르는 거대한 절이었다. 이런 규모는 바로 앞에 펼쳐진 황룡사보다 약간 작은 것이다. 황룡사의 동서 너비는 176m이다.

 

분황사(芬皇寺)는 황제의 향기가 나는 절이라는 뜻인데, 지금 같아서는 향기는 커녕 쇠락한 모습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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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